용인 고려 가마터서 1천년 전 왕실 제사그릇 30점 무더기 발견
박상현 / 2022-04-25 10:04:07
문헌에 나오는 보·궤 등 유물…"온전한 제기 다량 출토 첫 사례"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경기도 용인 고려시대 가마터인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용인 서리 고려백자 요지'에서 1천 년 전쯤 만든 왕실 제기(祭器·제사 관련 그릇이나 도구)로 추정되는 도자기 수십 점이 한꺼번에 발견됐다.
용인시와 매장문화재 조사기관 서경문화재연구원(원장 임영호)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서리 335-1번지 일원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해 조사지 북쪽 건물터 외곽의 구덩이로 보이는 장소에서 왕실 백자 제기 약 30점을 찾아냈다고 25일 밝혔다.
거창하지는 않지만 나랑 얽힌 사연이 조금은 있어 그걸 우선 밝혀두고자 한다.
저 발굴 소식을 나는 이번달 12일 업무차 용인에 들렀을 적에 들었으니, 그 전날인지 학술자문회의를 했다 하고, 그런 까닭에 그 주요 발굴성과에 대한 개요와 관련 도판을 봤다.
서경문화재연구원에 발주한 용인시에서는 이런 성과를 문화재청 두 군데다 보고했다 했으니, 하나는 이번 조사를 가능케 한 조사비를 제공한 보존정책과이며, 다른 한 군데는 발굴조사를 주무하는 발굴제도과였다.
이처럼 업무가 부서로 분산될 적에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 자칫하면 두 군데 다 신경을 상대적으로 쓰지 않은 일이 빈발한다는 점이다. 이 경우가 그에 해당하는지는 내가 자신이 없다.
다만 보존정책과에서는 발굴성과 그 자체가 주된 업무라 보기는 힘들고, 발굴제도과는 그 나름대로 이건 저쪽 과 업무인데 할 수도 있는 노릇이라, 용인시 보고에 문화재청 저 두 부서에는 이렇다 할 간섭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 이튿날인가 용인시가 자체로 그 출입기자들한테 보도자료를 뿌릴 요량이었다고 들은 듯하다.
문화재 관련 보도시스템을 보면 전국적인 관심사라 할 만한 케이스는 거개 문화재청 해당 과에서 직접 배포하는 형식을 취하지만, 기타 소소한 사안은 지자체에 그 처리 전권을 넘긴다. 이걸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꼭 그렇게만 볼 사안은 아니다.
아무튼 내가 아무리 도자 문외한이라 하지만, 대뜸 보아도 그냥 넘길 일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보도자료 배포 계획은 일단 연기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간단히 말해 이 사안은 중요하니 문화재청이 직접 관장케 해서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모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걸 또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홍보는 그 사업 흥망성쇄를 결정하는 핵심이다. 그것이 잘되느냐 못되느냐에 따라 그 사업 자체가 아주 없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잘 포장해야 하며 잘 팔아먹어야 한다.
도자라는 관점에서 용인은 피해 의식 비스무리한 게 있다. 인근 여주 이천 광주는 도자기는 잘도 팔아먹는 모습이 부럽게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용인이 보유한 도자 관련 유산이 저들에 견주어 떨어지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고 본다. 용인 서리 가마 유적은 그 전통을 시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그런 가마터를 갖추고도 도자로 이렇다 할 장사를 하지 못하니 하긴 환장할 노릇이기도 하겠다.
이에 나는 보도자료 배포 계획을 일단 연기케 하고는 문화재청 관련 과에 직접 전화해서 발굴성과가 이러이러한 듯하니 중요하지 않나 싶다. 문화재청에서 직접 홍보에 나서줌이 좋겠다 요청한 것이다.
그렇게 묵히며 준비한 보도자료가 마침내 오늘 문화재청을 통해 배포된 것이며 그를 토대로 하는 각종 언론보도가 잇따르게 되었다.
홍보? 그게 무에 중요하냐 하겠지만 다시 말하지만 홍보만큼 중요한 분야 없다. 기자 그 자체는 힘이 없지만 그들도 인지하지 못하는 그 막강한 힘이 아직도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번에 손을 대기 시작한 저 가마터는 대한민국 문화재보호법상 공식 명칭이 사적 용인 서리 고려백자 요지 (龍仁 西里 高麗白磁 窯址) Goryeo White Porcelain Kiln Site in Seo-ri, Yongin 다.
왜 저에다가 굳이 고려백자라 했는지 모르겠다만, 도자사 하는 지인한테 들으니 이에서 생산한 주종이 백자임은 틀림없다 한다.
이 친구들이 이번 발굴에서 수습한 백자제기 중에서도 대표상품이라 해서 내세운 보(簠)와 궤(簋)라는 물건이라, 그 모형은 말할 것도 없이 청동제품이지만, 훗날 그것을 모티브 삼아 도자기로 굽기도 한 것이다. 저런 것들을 흔히 제기祭器라 하니, 제기 뭐 거창한 듯 이야기하지만 귀신들을 위한 음식그릇이라 보면 간단하다.
귀신은 산 사람과 다르므로 산사람이 사용하는 것들과는 다르다는 표식을 해야 한다. 저들 그릇만 해도 산사람이 쓴다면 대체 어디에다 쓰겠는가?
귀신들이 쓰는 물건은 산 사람이 쓰는 그것에 견주어 암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데 핵심이 있다.
또 하나 저 도자기를 보면 언뜻 푸른색 계통 유약 빛깔이 돌아 청자 아닌가 하겠지만, 고령토 흰색 태토를 쓴 백자임은 명약관화하며, 실제 태토 분석을 통해서도 백자임이 다 드러나 이론이 있을 수 없다고 내 도자사 지인이 말해준다. 그렇다면 왜 백자인데 저리 아리까리 아리숑숑한가?
도자기 수준으로 볼 적에 이번에 출토한 제기들도 그 지인에 의하면 왕실 제기용이라고 단정하기는 힘들단다. 제기임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실에 진상할 정도로 최고급품은 아니란 것이다. 이에서 유의할 점은 왕실 조공품이라 해서 중요하고, 그러지 아니하다 해서 덜 중요한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요런 친구들이 고스란한 모습으로 출토됐으니 그 폼새를 보면 절구통 같기도 하다.
저들 백자에는 요런 뚜껑도 발견된 모양이라, 거북이 모양을 본떴다 한다.
이것이 지하에서 출현하던 모습이라, 저런 불규칙한 원형 혹은 타원형 땅구덩이에서 발견된 점으로 보면 폐기장 쓰레기장 아닌가 싶은데, 조사단에서는 완제품을 감별하기 위해 임시보관하던 장소 아닌가 하는 조심스런 견해를 제출한다.
이번에 발굴한 지점인데, 유의할 점은 가마 몸통을 까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 전면 마당 같은 데를 팠다는 점을 기억했으면 싶다. 이런 데는 볼짝없이 그 가마 운영과 관련한 부속시설이 들어서기 마련이라, 하다 못해 땔감을 보관하기도 했을 것이요, 탱자탱자 노는 십장이 낮잠 잤을 수도 있다. 왼편 상단 짤린 부분이 가마 몸통이 시작하는 바깥지점이다.
이 가마터는 저 도로를 지나면서 나로서는 여러 번 봤으니, 현재 상태가 저런 식으로 둔덕이 두 개가 있는 모습이라, 저 전체 길이가 87미터인가 이른다고 한다. 다만 이 87미터가 온전한 하나의 가마인가 하는 데는 논란이 적지 아니해서 후대에 잦은 가마 교체 과정에서 빚어진 현상, 다시 말해 시기를 달리하는 가마를 여러 번 만들다가 저런 현상이 빚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가 있다.
내 지인에 의하면 가마는 길어봤자 그 길이가 40미터대라고 하니, 저건 하나의 가마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비대하단다.
그렇다면 이전에는 저에 대한 조사가 없었을까?
했다. 호암미술관이 손을 이미 80년대에, 것도 세 차례나 댔다. 당시 발굴조사에서 저 롱다리 가마 몸통까지 다 칼자국을 댔단다.
조사 자료를 보니 1984년 1차를 시작으로, 87년 2차, 88년 3차 조사까지 벌였으니 그 성과는 아래 조사보고서를 통해 정리되었다.
호암미술관, 1987, 『용인 서리 고려백자요 발굴조사보고서1』.
호암미술관, 2003, 『용인 서리 고려백자요 발굴조사보고서2』.
나는 저 보고서는 검토하지 못했다. 따라서 저에 대한 이해에 지금도 애를 먹는 중이다.
기록을 보면 당시 발굴조사는 대빵 이종선, 부대장 김재열, 꼬바리 박순발이라고 나온다. 물론 이들은 발굴단에서 상층부를 이룬 사람들이라 실제로 삽질 열심히 한 사람들은 따로 있다.
개중 한 명이 삼한문화재연구원장에서 다음달 물러날 예정인 김구군이라는 첩보를 입수하고 오늘 내가 저와 관련한 몇 가지를 물었더니, 이 형님이라고 어찌 30년 전 일을 환하게 기억하겠는가?
다만, 2차, 3차 조사에 참여했다는 그는 흐릿한 기억으로 상층 진흙가마, 아래층 벽돌가마 구조였음을 기억했으니, 간단히 말해 저 밖으로 노출된 가마는 진흙가마지만, 그 아래에서는 그 선대에 만들어 운영한 벽돌가마가 있음을 확인했단다.
그 벽돌가마는 가마 바깥을 파고 내려가서 확인하는 수법을 썼다는데, 벽돌가마 조사는 존재만 확인했을 뿐 그 전체 조사를 위해 상층 진흙가마를 날릴 수는 없어 벽돌가마는 존재만 확인하는 선에서 조사를 그쳤단다.
저 발굴은 조사자와 발굴보고서 작성자가 다르다. 초창기 조사자들이 하나둘 호암을 떠나면서 그 뒷처리는 다른 사람들이 담당했으니, 발굴보고서는 현재 아모레퍼시픽 관장으로 옮긴 전승창이 주도해서 썼다고 안다.
저에서 수습한 유물 정리에 관여한 꼬바리도 있었으니, 개중 한 명이 지금 이화여대박물관장이자 미술사학회장으로 잘~~~ 나가는 장남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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