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산 13호분 이른바 '아라가야 천문도' 별자리가 공개되자 이 분야 직업적 학문종사자들은 압도적으로 조사단 오판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고인돌에서 더러 보이는 이른바 윷판 혹은 성혈(星穴)돌을 무덤 덮개돌로 재가공한 데 지나지 않은데 조사단이 그런 사실로 모른 채 성급하게 그리 판단해 발표함으로써 국민을 오도한다는 골자다. 뭐, 그럴 수도 있다 쳐야지 어쩌겠는가? 그런 반응 혹은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고고학이 과연 고고학도 스스로가 말하는 것처럼 정말로 순수한 학문인가를 의심했더랬다. 다른 여타 학문 분파가 그런 것처럼 당파성 농후하기는 이쪽도 피장파장 밑끼나똥끼나 수준이었다.
한달 전, 이 발굴소식을 구두로 접할 때만 해도 나 역시 고인돌이구만 했더랬다. 그랬더니, 그쪽에서 대뜸 "아니다. 별자리 맞다"고 강변하는 것이 아닌가? 직후 관련 자료들을 받아든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다른 무엇보다 그것이 발견된 지점이 문제아였다. 그곳은 무덤 덮개 중에서도 딱 한복판이라, 무덤 안에서는 바로 '하늘'이었다. 무덤은 그 자체 어둠이요 음陰의 영역이라, 무덤은 언제나 시간으로는 밤이 펼쳐진다. 그런 밤 세계의 하늘에 다름 아닌 그 별자리가 들어앉았던 것이다.
그에 더해 13개인가 하는 그 무덤방 덮개돌 중 유독 그 돌만 달랐다. 무덤을 쓰는 사람들이 이 돌만 특별 대접을 했다는 흔적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었다. 이 지점에서 나는 이런 현상이 고인돌 재사용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가야시대 천문도가 확실하거나, 혹은 그럴 가능성이 농후한 흔적임을 처음으로 확신한 순간이었다.
그래서 이 현장은 언론 홍보라는 관점에서 '포장'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간단히 말해 이런 성과는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선전되어야 했다. 이를 극대화하고자 실은 내가 문화재청장과 경남도지사 동시 내방을 추진한 것이다. 아무래도 두 기관장이 움직이면 그만큼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도 더 받을 테니 말이다. 그러면서 관련 자료 일체를 우리 공장 문화재 담당 박상현 기자한테 넘겨주면서 알고는 있으라 했다.
이 발굴은 언론이라는 관점에서 이런 발굴은 상타기 딱 좋다. 이른바 특종상 말이다. 하지만 이 건은 키우고 싶었다. 그래서 곧장 이를 위한 작업에 들어갔으니, 저번 무장읍성 비격진천뢰 발굴 때와 마찬가지로 문화재청장 내방을 추진했던 것이며 청장 역시 그러면 내려가 보는 것이 좋겠다는 의사를 담당과에다가 전달했다. 마침 그때 함안군수가 다른 일로 대전 문화재청사로 청장을 내방해 이런저런 문화재 관련 업무보고를 한 자리가 있었다. 그날이 아마 월요일이었다고 기억하거니와, 그 자리에는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장 김삼기가 배석했다.
이 자리에서 함안군수는 함안 관련 문화재 현안들을 보고하고 나서는 "말이산 고분 발굴성과가 이러이러하니 꼭 청장님이 내방해주셨으면 좋겠다. 김경수 도지사님도 청장님이 오신다면, 참석하는 쪽으로 생각해 보겠다고 하신다"고 했던 것이며, 사전에 현장 탐방을 계획하고 그런 의사를 표시한 정재숙 청장 역시 그러겠다고 맞장구를 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함안군수는 이를 경남도에 전달하면서 도지사도 꼭 왔으면 한다고 요청한 것이다.
그러는 사이 현장은 더 바빠졌다. 자문위원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함안군에서는 비밀 준수를 자문위원들한테 부탁했다. 공식 발표는 나중에 하기로 했으니, 그때까지만 발설을 참아달라 했다.
문화재청에서는 청장이 간다 공표하니, 주무과인 발굴제도과가 바빠졌다. 그래서 현장 사정 파악을 위해 발굴제도과 조미순 학예연구관이 내려갔다. 현장을 둘러본 조 연구관은 청장 내방 계획에 대해 지극히 부정적인 보고를 올렸다. 내부 공개 혹은 내부 출입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이었다. 덧붙이건대 앞서 말한 저 자문위원회에서도 내가 알기로 실제 무덤 내부에 들어간 사람은 없다. 그만큼 현장 사정을 실제 열악했다.
그런 보고에 청장도 계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현장 방문은 없던 일로 하기로 했다.
그 직후 내가 현장을 갔다. 평일 하루 휴가를 내고 갔다. 가서 보니 조미순의 판단은 옳았다. 당시 현장 사정으로는 도저히 형편이 안됐다. 다른 무엇보다 청장이 참석한 가운데 대언론 공개는 내부 공개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데, 발굴현장 안팎 사정이 다 좋지 못했다. 무엇보다 무덤 안은 내려앉은 돌더미가 가득했고, 더구나 입구는 사람이 기어서, 미끄러져서 들어가야 했다. 땅까지 질퍽해, 그리고 온통 흙먼지라 나는 비닐푸대 같은 보호복을 입고는 머리를 먼저 들이밀고는 배타기를 한 채 무덤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가서 살폈다. 고인돌인가? 아니었다. 명백히 고인돌 재활용이 아니었다. 그래도 못내 미심쩍어 조사단에 물었다.
"고인돌이 아닌 좀 더 적극적인 증거는 있는가?"
이런 물음에 함께 들어간 조사단원이 후래시를 비추면서, 문제의 별자리가 드러난 그 덮개돌 양쪽 걸친 부분을 비췄다. 그것이 걸친 양측 벽면은 다행인이 요행인지, 상당 부분이 노출된 상태였다. 그 덮개돌이 걸친 양측 벽면 바로 밑에는 각각 들보를 걸쳤던 흔적으로 짐작되는 깊숙한 구멍이 있었고, 그 구멍 위쪽이 노출된 상태였다. 조사단원이 말한다.
"저희들도 그런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여긴 별자리 흔적이 없지요?"
그랬다. 신통방통하게도 소위 별자리는 흙과 돌로 덮힌 반대편 위쪽은 어떨지 모르나, 적어도 노출된 부분만 볼 적에 신통방통하게도 무덤 바닥을 내려다 보는 아래쪽만 있었다. 양 측면에도 없고, 더구나 벽면에 걸친 부분에도 없었다. 이는 무엇을 말함인가?
이 덮개돌을 얹은 상태에서 별자리 흔적을 새긴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해도, 미리 설계도가 있었다면, 금을 긋고는 무덤 안쪽으로 노출된 면에만 모종의 흔적을 새긴 것이다.
저것이 별자리가 아닐 수는 있다. 하지만 별자리일 가능성은 90% 이상이었다.
그러고는 다시 무덤방에서 기어나왔다. 역시나 대가리를 먼저 들이밀고 배치기를 하면서 기어나왔다. 밖에서 물었다.
"가능하겠는가?"
"얼마든 가능합니다."
"그래? 알았다. 내가 이 발굴 작품 하나 만들어주마"
나는 믿음이 있다. 좋은 발굴 훌륭한 성과는 그에 걸맞는 대접이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애초 내가 약속한 것 중 경남도지사 내방 건은 불발되었지만, 그래도 청장이 내려가서 성대한 의식 속에 장대한 아라가야 천문도(혹은 추정 천문도)가 화려한 팡파르를 울리며 공개되고, 더구나, 그런 사실이 도하 각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으니, 나로선 그나마 할 일을 한 셈이라고 적어둔다.
마지막으로 하나 덧붙일 대목은 저런 사정으로 애초 온다던 청장 내방 계획이 무산되고, 그러다가 다시 수립되고 추진되면서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조사단과 함안군이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 고충에 대해서는 이 자리를 빌려 사과의 뜻을 전하고자 한다. 다 나 때문이다. 내가 끼어들지 않았으면 겪지 않아도 될 많은 고충을 저들이 감내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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