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계옥 퇴임
요새 한국사회는 고모가 유행인데, 조카 사랑이 끔찍할 정도로 유별난 문화재계 인물로 이만한 사람이 없다. 혹자는 그가 독신이라, 사랑을 쏟을 데가 조카밖에 없기 때문이라 하겠지만, 이유가 무엇이건, 조카 사랑 특별하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이 조카를 데리고 해외여행을 다니는 재미로 산다.
그는 혹독했다. 나야 기자와 취재원으로 만나 그런 일을 겪을 틈이 없겠지만, 그와 같이 일한 사람들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혹자는 그가 편애가 심하다고도 한다. 그만큼 죽이 맞지 않은 직원들은 같이 일하기 힘들어했다. 그 정도가 지나친 듯해서, 나를 포함해 주변에서는 살살 하라고 말린 사람도 많다.
죽이 맞는 사람과는 생사를 같이할 정도로 신나게 일을 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쫓겨났다. 이만큼 인구에 회자하는 인물도 드물다. 그만큼 그는 유별났다. 내가 언제 기회가 닿으면, 그를 심층 인터뷰해 그의 삶과 그의 생각, 그리고 문화재청 공무원 생활을 정리하고 싶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 그런 기회가 제대로 오지는 아니했다.
그런 날을 기대하며, 대신 이런 그가 퇴직했을 적에, 내가 마침 그 자리에 있었고, 그 증언으로써 탈초한 짧은 기사 한 토막이 있으므로, 그것으로써 대치하며 훗날을 기약하기로 한다.
정계옥 퇴임식
<눈물 보이며 퇴장한 고고학계 '정다르크'>
송고시간 | 2012-03-13 10:36
1세대 여성고고학도 정계옥씨 "문화재가 있어 행복했다"
(대전=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문화재청 다면 평가에서 항상 꼴찌를 다투는 중간간부. 그와 같이 일한 직원이면 그와 척을 져서 등을 돌리는 일이 많다. 그만큼 일에서는 냉혹했으며 그래서 내부에서 적이 많았다.
아무리 직속 상사라고 해도 부당한 간섭이나 지시는 그 자리서 거부했다. 문화재청장이라고 예외는 아니었으며, 그가 평생의 직장으로 생각하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도 이런 자세는 여전했다.
이런 그가 무서워 문화재청 매장문화재과 학예연구관으로 일할 때 해당 과에서는 그를 출장이나 휴가를 보내놓고 업무를 처리하기도 했으며, 연구소 미술문화재연구실장으로 옮겨서는 소장과 번번이 부딪쳤다.
다면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 리 만무한 그를 문화재청은 최근 과장급 인사에서 아무런 보직이 없는 평연구관으로 발령냈다. 그러자 "때가 되면 미련없이 떠나겠다"던 평소의 소신대로 정말로 미련없이 그날로 사표를 던졌다.
정계옥(56). 일반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문화유산계에서 이 독신의 여성 고고학도를 '천하의 정계옥'으로 부른다. 잔다르크에 빗대어 '정다르크'라고도 한다. 그만큼 고고학계에서 그는 여걸로 통한다. 아니, 차라리 '철녀'라고 불러야 한다.
정계옥 퇴임식
12일 저녁 대전정부청사 인근 한 호텔에서 열린 '정계옥 실장님 명예퇴임식'에는 그를 결국 공직에서 밀어낸 다면평가가 한편에서는 허울뿐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자리였다. 이 자리는 문화재청이나 연구소 공식 행사가 아니라 그가 마지막으로 재직한 연구소 미술문화재연구실이 주최한 행사였다.
식장에는 정년보다 5년 먼저 명예퇴직이라는 형식으로 퇴임하는 그를 아쉬워하는 동료, 후배 공무원으로 가득 찼다. 이는 그가 문화재청 전체로 보면 어쩌면 '퇴출'하거나 평연구관으로 '강등'해야 할 공무원일지 모르지만, 잘못된 삶을 살지는 않았음을 웅변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 철녀도 만감이 교차하는 듯 식장에서 자주 눈물을 보였다.
"명예롭지 않은 명예퇴임식에 아무나 참석하는 건 아니다"는 말로 답사를 시작한 그는 "스물네 살 생일에 익산 미륵사지 발굴현장에 투입된" 이래 31년에 이르는 공직생활의 회한과 보람을 토로했다.
"(국립문화재) 연구소에 처음 왔을 때 술을 마시지 못했습니다. 고고학 하는 사람이 술도 못 마시느냐는 소리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활을 버티며 일용직으로 8년7개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1988년 서른세 살 늙은 나이에 정식 학예사가 됐습니다."
기억에 남는 일로는 1990년대 나주 복암리 고분 발굴을 꼽았다. 퇴임식장에 참석한 윤근일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을 가리키면서 이런 말도 했다.
"(복암리 고분) 석실 내에서 옹관을 처음으로 확인했습니다. 한데 도굴당한 무덤인지 아닌지 처음에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는 들어가서 확인해야 했습니다. 윤 선생님이 자기가 들여다보기 싫으니깐 저더러 '야, 계옥아. 네가 들어가라'고 하시더군요. 뱀이 나올지 모르는 무덤 속을 그렇게 해서 제가 들어갔습니다."
이렇게 발굴한 성과를 통해 "백제고고학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한 일은 고고학도로서 잊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일본 오사카대학 유학시절에는 일본으로 유출된 고려동종을 발견하고는 소장자와 관계기관 등을 집요하게 설득해 국내에 반환한 일도 보람 있는 일로 꼽았다.
그 외에도 창녕 송현동 6·7호분 발굴이라든가 문화재청 매장문화재관 재직 시절 서울 동대문운동장 자리를 발굴토록 한 일, 국립고궁박물관 전시과장 재직시절 대한제국 유물을 정리한 일 등도 잊을 수 없다고 회상했다.
문화재와 함께한 인생을 "극성맞다"고 표현한 정 전 실장은 "(최근 인사에서 평연구관으로의) 강등이라는 사건이 있었지만 저의 생은 행복했다고 생각한다"면서 "이제는 50대 중반의 여인으로 돌아가 문화재가 나아갈 길을 이야기하면서 모니터링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지금) 연구소에 대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들립니다만, 후배들이 고비를 잘 헤쳐나가 대한민국에서 우뚝 서리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재가 있어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눈물 보이며 퇴장한 고고학계 '정다르크'>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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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eshik@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2/03/13 10:36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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