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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모내기가 도박이었던 벼농사로 먹고 사는 나라

by 초야잠필 2022.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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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이전 전근대 사회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란 절대적이라 할 수 있겠다.

전근대사회에서 농업생산력은 그 나라 인구나 국부와 직결되어 있고 특히 동아시아 사회에서 쌀 농사 생산력은 그 나라 국세를 결정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아시아 사회는 모내기가 보급된 이후 거대한 변화가 일었다.

농업생산성이 급격히 올라가 인구가 급증하고 이렇게 축적된 힘이 19세기 중반, 서세동점의 추세에 버틸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고 해도 좋다.

일본이 식민지가 되지 않고 성공적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힘의 바탕도 결국 도작을 중심으로 한 그 전통사회의 농업생산력에 기반한 것이다.

모내기가 동아시아에 보편화하여 생산성을 급증시키는 이러한 추세를 따라가지 못하면서 한국의 경우, 주변국가에 비해 국세가 위축되고 마침내 20세기 초반 식민지화의 길을 걷게 되는 불행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모내기는 중국의 경우 자그마치 남송시대에, 일본의 경우 무로마치 시대에 이미 보편화하기 시작했는데 우리나라는 임란 이후까지도 모내기가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한국에서 모내기가 자리잡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한해 벼농사를 시작해야 할 때쯤 어김없이 찾아오는 가뭄 때문이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보던 "봄가뭄"은 조선시대도 역시 골치거리로 이때 봄가뭄이 심해 모내기를 망치면 한해 농사를 몽땅 날려 먹을 판이었다.

이 때문에 조선후기까지도 정부는 모내기를 일종의 "도박"으로 간주하고 이를 금지하기까지 했는데 이에 대한 기록은 실록 등에 수두룩하게 나온다.

조선시대 농부는 벼농사짓는 내내 "크게 한탕하느냐" 아니면 "몽땅 날려먹느냐"의 아슬아슬한 고비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내기를 하면 크게 수확할 수 있다는 생각과 그러다가 한해 농사를 다 날려 먹을 수 있다는 갈등이 당시 농부를 계속 괴롭혔을 것이다.

조선후기에 그나마 모내기가 비로소 가능해진 것은 삼남지방에 수많은 수리 시설, 특히 "보"가 많이 건설되면서 부터이다.

(조선시대에 우리나라 수리시설은 "저수지"가 주력이 아니었다.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보"가 수도 없이 건설되면서 비로소 제대로 된 모내기가 가능해졌다고 본다. 김동진 선생의 연구에 자세하다.)

다만 이렇게 되었다고 해서 "벼농사의 질곡"에서 한국이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은, 가까이는 1980년대까지도 봄만 되면 모내기를 해야 할때 가뭄이 들어 죽네 사네 한 신문보도의 기억을 되살려 보면 알 것이다.

북한이 저렇게 쫄딱 망하게 된 것도 같은 이유라 할 수 있다. 애초에 벼농사 자체가 도박에 비유할 만큼 조건이 안 좋은 동네에서 대책없이 죽도록 벼농사에만 매달리니 흉작과 빈곤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북한의 쇠망은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이전의 한국사가 가지고 있던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 벼농사의 질곡-을 무시한 데에 기인한 바 크다.

한국사에서 벼농사란 문명을 가져다 준 고마운 존재이면서도 도박이나 다름 없는 악조건 속에서 이를 유지해야 하는 양면성이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한국인이 비로소 굶주림에서 해방 된것은 벼농사에 매달리지 않게 되면서부터라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한국 문명은 없는 살림을 필사적으로 쥐어짜 그 문명의 유지에 투자한 눈물겨운 악전고투의 산물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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