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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ING HISTORY

묘제와 봉분

by taeshik.kim 2018.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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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 가서 조상을 제사하는 행위인 묘제墓制 혹은 묘를 살피는 성묘省墓는 실은 각종 의례서에서는 근거를 찾기 어렵다. 이는 아마도 어느 일정 시기까지 무덤에다가 그 표식인 봉분을 만들지 않은 데서 비롯한 것으로 나는 본다. 중국사를 보면 공자 이전에는 봉분이 없어, 일단 무덤을 쓰고 나면, 그 위치는 후손도 이내 잊어버린다. 그런 까닭에 장소도 모르는 묘제가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묘제의 제1 성립 조건은 그 위치 확인이다. 묘제를 둘러싼 이렇다 할 규정이 없는 까닭은 나는 이런 역사성에서 말미암는다고 본다. 묘제 혹은 성묘는 때마다 무덤을 소제하는 행위인 소분掃墳 혹은 잡초를 베어내는 벌초伐草와도 밀접하다. 

봉분이 없던 시대, 조상숭배는 자연 조상의 혼이 깃들었다고 간주하는 사당인 종묘宗廟 혹은 가묘家廟, 그 신체神體가 깃들었다는 밤나무 막대기인 신주神主 문화 발달을 불러온다. 종묘와 가묘는 시체와 혼의 분리를 위한 시설이다. 이 시대 무덤은 저 먼 곳에다가 만드는 일이 보통이니, 하기야 거리가 문제가 되었으리오? 어차피 무덤 제사가 없는데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 점이 조선시대 일부 지식인 사회에서도 궁금했던 모양이다. 조선 중기 때 문사文士 심수경(沈守慶․1516~1599)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 보이는 이야기다. 

우리나라 명절 중에 설날ㆍ한식(寒食)ㆍ단오(端午)ㆍ추석(秋夕)에는 묘제(墓祭)를 지내고, 3월 3일(상사일)과 4월 8일(석탄일), 그리고 9월 9일(중양절)에는 술 마시고 논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묘제는 3월 상순에 지낸다’고 했으며, 중국에서는 지금도 이같이 행한다. 우리나라 풍속에는 네 명절에 지내는데, 그 출처는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국조)오례의(五禮儀)》에는 ‘설날ㆍ단오ㆍ추석에는 사당에서 제사지낸다’고 해서 한식은 빠졌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모두 묘제는 지내니, 또한 그 어찌 된 까닭인지 모르겠다. 중국에서는 한식에 그네를 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단오에 그네를 타니, 명절에 행하는 풍속 역시 무슨 연유로 다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라에서 지내는 능묘(陵墓) 제사가 지극히 번거롭고, 사삿집 묘제(墓祭) 역시 번거롭지만 예(禮)를 어기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임진난 후에는 나라의 제사가 감해졌으니, 사삿집 묘제도 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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