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 동구릉 태조 이성계 건원릉 신도비.
서거정(徐居正·1420∼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제2권에 보인다.
태조(太祖) 건원릉(健元陵)의 비는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이 지은 것이요, 태종(太宗) 헌릉(獻陵)의 비는 문숙공(文肅公) 변계량(卞季良)이 지은 것이며, 세종 영릉(英陵)의 비는 문성공(文成公) 정인지(鄭麟趾)가 지은 것이다. 문종(文宗) 현릉(顯陵)에서는 세 능의 전례에 의하여 곧 비를 세우려고 공역(功役)을 이미 시작하였었는데, 어느 건의하는 자가 아뢰기를, “예로부터 임금이 행한 사적은 국사(國史)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사대부와 같이 신도비(神道碑)를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중지하소서.” 하여, 이를 좇았다. 뒷날 영릉을 여주(驪州)로 옮김에 따라 또한 비를 매장하고 쓰지 않았으니, 본조[國朝] 능침(陵寢)에 비를 세우지 않은 것은 현릉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건 내가 심각히 보지 못했으니, 이후 전통이 어찌되었는지 한번 봐야겠다. 진짜로 이후 왕릉엔 신도비가 없던가? 헷갈린다.
건원릉 신도비 귀부
추기) 이 분야에 밝은 몇몇 지인에게 알아보니, 진짜로 이후에는 왕릉 신도비가 없는 듯하다. 그렇다면 왕릉 신도비는 어째서 사라졌는가? 서거정이 말하는 저 이유로 사라졌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외려 서거정이 이런 기록을 남김으로써, 이후 영영 조선왕릉에서 신도비는 자취를 감추었다고 본다.
무슨 말인가? 이 《필원잡기(筆苑雜記)》는 조선시대 내내 가독성이 아주 높은 텍스트였다. 이 가독성은 첫째, 그 저자가 조선왕조 전체를 대표할 만한 사가정 서거정인 데다, 둘째 무엇보다 그 수록 내용이 흥미진진한 까닭에 시종일관해서 인기를 누린 스테디셀러였다. 이런 책에 저와 같이 왕릉에는 신도비가 필요없다고 사실상 못을 박아 놓으니, 이후 어찌 왕릉 신도비를 쓰겠는가? 텍스트와 기록이 지닌 힘을 새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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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왕릉 신도비는 사라진 반면 사대부 신도비는 더욱 극성하게 되었다는 대비다. 왜 이럴까?
그 답 역시 저 사가정 말에서 구해야 한다고 본다.
왕은 신도비가 아니더래도 사책에 그 행적이 풍부히 있는데 신하들은 그렇지 아니해서 언제건 멸실 인멸될 위기에 처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신도비에라도 그 행적을 남겨야 했다. 이것이 사대부 신도비가 극성한 이유다.(2017. 12. 16 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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