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긴한 개인 일정이 있어, 그것도 모른 채 덜커덩 해버린 다른 약속을 취소하며 6시가 넘자마자 그 자리를 가려 일어서려는데 휴대폰으로 전화가 울린다. 이름이 뜨는데 유진룡 장관이다. 순간 느낌이 좋지 않다.
유 장관은 수림문화재단 이사장, 어차피 수림재단이랑 우리 공장이 함께 제정 시행하는 수림문학상 올해 시상식이 내일 수송동 우리 공장에서 있을 예정이라, 내일 만나야 한다. 그 자리를 빌려 유 장관 인터뷰를 할 작정이었다. 그런 그가 이 시간에 전화를 먼저 했으니 뭔가 긴급한 사안이라는 그런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말인즉 이성원 차장이 별세했단다. 하필 이럴 때 그 예감이 이런 식으로 적중할 게 뭐란 말인가?
숭례문 화재 직후 국회에 출석한 이성원..오른쪽이 유홍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요새 몸이 좋지 않다는 말은 들리긴 했지만, 그래서 전화도 받지 않는다 해서 나까지 형을 괴롭힐 일은 없다 해서, 또 따로 연락을 한 일이 없기도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두어달 전쯤 어느 밤이다. 문화재청을 퇴임한 김상구 과장한테서 전화가 다급한 전화가 왔다. "이 차장님이 통 연락이 안 되는데 아프다는 말이 있다. 대체 어떻게 된 거냐" 하기에 "글쎄, 금시초문이요" 했더니, 김 과장이 버럭 화를 내면서 "사람이 왜 이래? 형님 형님하면서 그렇게 따르더니, 대체 차장님 근황도 모른단 말이오?" 하는 게 아닌가? 나 역시 어안이 벙벙해 무슨 일인가 수소문에 들어갔으니, 형이 매양 어울리는 문체부 멤버 중에 최규학 전 기조실장이 있어 전화를 넣으니 받지 않아, 할 수 없이 형과 단짝인 유 장관한테 전화를 넣었더랬다. 나중에 유 장관이 콜백을 해서 하는 말이 "요새 몸이 안 좋다. 그래서 연락도 통 끊고 지낸다. 지금은 그냥 조용히 놔두는 방법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랬다. 나까지 괜히 심란케 할까봐, 부러 연락도 하지 않았다. 당시 사정을 보면, 내가 전화했더라도 아마 받지 않았을 성은 싶다. 그래도 이리되고 보니 맘이 아프다. 목소리라도 들어둘 걸....
이성원 (李成元). 1956년 9월 28일생인 그는 건국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81년 행정고시 23회(24회가 맞다는데 일단 우리 공장 인명사전을 따라 23회라 해 둔다)에 합격해 공직에 발을 디딘 문화부 정통 관료였다. 내가 형과 본격 연을 쌓기 시작한 시점은 형이 2001년, 국립중앙박물관 건립추진기획단장을 맡으면서였다. 새용산 국립박물관 개관 준비를 했으니 말이다. 2003년에는 문화관광부 문화정책국장이었다. 그의 관료 인생은 2006년 문화재청 차장에 임명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내가 알기로 그 자신은 문화재청 차출을 내켜하지 않았다. 비록 1급 차장으로 승진이기는 했지만, 그는 계속 문화부로 남고 싶어했다. 그런 점에서 문화재청 차장 전출을 그 자신은 밀려난다는 느낌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에 대해 내가 직접 물은 적도 있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그런 건 머하러 물어쌓노"라는 식으로 얼버무리곤 했다.
만 50세에 오른 1급 문화재청 차장. 관료로서는 더는 오를 데가 없는 이 1급을 그가 왜 그리 내켜하지 않았는지는 나이가 조금은 설명이 될 듯하다. 1급은 언제건 자리를 비켜주어야 한다. 만 50세 1급은 곧 퇴직 준비이기도 했으니, 그 심정을 누가 이해하겠는가?
화려한 듯한 그의 공직 생활은 결국 차장 생활 2년 만에 끝이 났으니, 다름 아닌 숭례문 방화사건이 그 직접 도화선이었다. 2008년 2월 9일 발생한 숭례문 방화사건은 그의 관직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돌이켜 보면 그가 책임질 것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그는 결국 옷을 벗었다. 자발로 벗고 말았다.
숭례문 화재 직후 국회에 출석한 이성원. 2008. 2. 11
그가 옷을 벗기 직전, 당시 문화재청장 유홍준은 각종 호사를 누린 채 유유히 사라져갔다. 이미 청장 생활만 3년 반인가를 하면서 물릴 대로 물린 그는 이 사건이 그 짐을 훌훌 털어버리는 구실이 되기도 했으니, 때마침 방화사건이 터진 그때, 대한항공 후원을 받아 부부가 유럽 여행인가 떠난 상태라 해서 동아일보에서 얻어텨져 청장직을 내려놓았다.
유홍준이 떠난 자리를 이성원이 외롭게 지켰다. 그것이 대략 마무리될 무렵, 그는 미련없이 옷을 벗었다.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고, 그 책임을 질 사람이 그 자신밖에 없다고 판단한 그는 공직을 떠났다. 만 52세. 그렇게 떠난 그는 긴 야인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에게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아까운 인재임을 적어도 문화계 주변에서는 누구나 알았기에 이런저런 자리 제안이 있었다. 하지만 그 모두를 그는 물리쳤다.
그러던 그가 다시금 공직 사회 주변에 나타난 것은 2012년이었다. 당시 문화재청에서는 국외소재문화재단을 출범했으니, 이를 실질로 이끌 사무총장으로 일찌감치 그를 낙점하고는 섭외에 나섰던 것인데, 이 지랄 같은 양반이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다가 이런저런 설득에 겨우 넘어가 마침내 그 초대 사무총장이 된 것이다. 당시 사무실이 우리 공장 인근 이마빌딩이었다. 이곳에서 2004년까지 일한 그에겐 나름 좋은 일 하나가 있었으니, 그와는 단짝인 유진룡이 박근혜 정부 초대 문화부 장관이 되었다는 그것이다.
유 장관은 재단을 물러난 그에게 한국관광공사 비상임이사 자리를 주었으니, 비상임이라 부담은 없었으나, 이성원 자신의 말을 빌리건대 용돈벌이는 되는 그 이사를 2014년 이후 2016년까지 지낸 것이다.
그는 똥고집 대마왕이묘, 자존심 대마왕이었다. 그의 고집은 누구도 꺾을 수 없었고, 자존심은 더럽게 셌다. 그리고 성질이 더럽게 급했다. 내가 알기로 그는 공직자로서의 자세를 시종일관 유지했다. 그렇다고 적절한 타협을 몰랐는가 하면, 꼭 그렇지도 않아 나름대로 정무감각도 있었다. 막 나가는 유홍준을 그나마 제어한 것도 이성원이었다. 유홍준이 청장 재직 시절, 각종 논란이 휘말렸을 때도, 그를 끝까지 보호할 줄도 알았다. 이것이 비호 혹은 덮어두기일 수도 있거니와, 대표적인 건이 유홍준 부여 별장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지금도 뇌관을 잠복하고 있거니와, 그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는 훗날 기회를 보고자 한다.
그는 자리 욕심이 없었다. 차장 퇴임 이후 그에게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문화재청장 하마평이 오를 때마다 그는 늘 1순위였다. 그렇지만 한사코 손사래를 치며 마다했다. 변영섭이 반구대로 왔다가 반구대와 함께 불과 7개월만에 침몰했을 때, 그 후임 1순위는 이성원이었다. 망가진 문화재청을 그나마 바로세울 적임자라 해서 그는 1순위로 청와대에 올라갔다. 하지만 그는 거부했다. 한사코 거부하는 그를 설득하기 위해 내가 강남 그의 자택을 야밤에 쳐들어가 밤을 새워가며 설득한 일도 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 그 초대 문화재청장을 찾았을 때도 이성원은 1순위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적임자가 아니라며 한사코 거부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토록 아끼는 후배 문화재청 차장 A를 한사코 밀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김종진 청장이 1년 만에 물러나자 다시 그는 1순위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거부했다. 다만 이때 이미 병마가 깊은 때라, 이전과는 달리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거절했다. 그것이 단순한 회피인 줄 알았지만, 이렇게 갈 줄은 미쳐 몰랐다.
형은 나한테는 사표였다. 때론 말이 험하기는 했지만, 뭔지 모르게 그가 주는 강렬한 포스가 있었다. 그는 흐트러짐 없는 공직자였다. 낭만을 알았으되, 난잡과는 거리가 먼 그런 사람이었다.
몸이 망가져가는 그런 순간에도 아끼는 후배가 공직을 떠난 뒤 환갑을 맞았다면서, 그 후배를 인터뷰하는 형식을 빌려 갖은 고역 끝에 회고록을 집필해 낸 그런 사람이었다. 이것이 불과 두어달 전이었다. 이런 책이 나왔다고 하면서, 그 책을 좀 읽어보라며 던져준 사람, 이런 사람이 문화재청장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 그런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이성원이다.
아!
그런 사람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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