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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문화재 기자 17년] (1) 왜 그리고 무엇을 쓰려는가?

by taeshik.kim 2024.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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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28일자로 나는 가당찮은 이유로 연합뉴스에서 해임되었다. 이를 통해 나와는 전연 인연이 없다고 본 해직기자라는 밴드를 팔뚝에 자랑스럽게 찼다.

해직을 통해 우선은 1993년 1월 1일  연합통신에 입사한 이래 23년간 계속한 기자 생활을 나는 청산했다. 우선이라고 하는 까닭은 그 해임에 대한 부당성을 논하는 법적 소송, 다시 말해 해고무효소송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소송이 언제, 어떤 식으로 결판날지 나는 모른다. 나야 물론 내가 당연히 이기리라고 보지만, 그것은 하늘만이 알 뿐이다. 기나긴 투쟁이 될 것이 뻔한 이 소송을 나는 느긋이 준비하고, 담담히 바라보려 한다. 

이번 일이 나로서는 침잠과 반추와 정리의 시간이다. 이에 이 황금 같은 시간을 빌려 지난 시간을 차분히 회고하며 그에서 내가 보고 들은 바를 정리하려 한다. 이제 겨우 반백인데 벌써 회고인가 할지 모르나 이번이 아니면 영영 이런 기회가 달아날 것만 같은 조급증이 발동했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조금이라도 기억이 더 생생한 지금이 아니면 기억날 것도 사라질 것이요 쓰야 할 것도 지워지리라. 양계초는 서른살에 《삼십자술三十自述》을 쓰고 호적은  마흔 즈음에 《사십자술四十自述》을 썼으니 《오십자술五十自述》 을 겸한 이 글이 나로서는 외려 너무 늦었다고 위로하고 한탄해 본다.

이 회고록이 어떤 의미를 지닐지 나는 모른다. 개중에는 지나치게 개인적인 일이 있을 것이요 그리하여 이조차 독자가 알아야 하느냐 하는 볼멘 소리도 들을 때가 많을 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이 글이 용케도 살아남아 백년을 버티고 삼백년을 견디며 천년을 전한다면 후세의 독자들에게는 그런대로 쓸모는 있으리라 본다.

그때야 장독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지 모르나, 지금은 장독대 덮개로라도, 혹은 시대 정신에 맞게 갓 더운 물 부은 컵라면 뚜껑을 짓누르는 데라도 쓰인다면 나로서는 참으로 과분한 대접이라 하겠다. 




이런 나에게 무엇보다 두려운 점은 제아무리 객관을 가장한다한들 내 유리한 시각에서 견문을 재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내가 보고 들었다 해서 그것이 곧 사실史實을 담보하는 것은 물론 아니로대 그렇게 강요했을 대목도 많을 것이다. 이런 한계들은 넓은 혜량을 구할 뿐이다. 

문화재가 한국 사회 전반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그야말로 새발에 난 피 한 방울, 멍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지난 반백의 절반을 태운 언론 분야로 더욱 범위를 좁힌다 해도 그 처지는 마찬가지여서 늘 각종 언론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정치 경제 사회에 견주어서 문화재는 존재감이 제로에 가깝다. 

하지만 나는 이리도 하찮을 법한 문화재 분야에, 그것도 언론인으로서 깊이 발을 디디고 그 대부분의 사건에서 내가 주축이었고, 주된 관찰자였으며, 증언자였다는 이력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그 하찮은 존재가 어떻게 하면 주인공으로 우뚝 서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기도 했다.

나는 매양 문화재 하나로도 한국 현대사를 쓰고 세계 현대사를 쓴다고 큰소리를 쳤거니와 그것이 단순한 허장성세만은 아니었다. 다른 모든 분야도 그렇겠지만 문화재 분야 역시 한국현대사의 축소판이며 세계현대사의 그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이번 기회를 빌려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하려 한다.

예서 거창한 철학을 제시할 수는 없으니 그건 내 능력밖의 일이다. 대신 나는 내가 몸담은 지난 17년간의 문화재 현장을 나를 내레이터로 삼아 독자들에게 안내하려 한다. 

말이 조금은 거창했다. 지금의 나로서는 이럴 수밖에 없는 처지가 있다는 것을 조금은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이 23년간의 기자 생활을 나는 한 회사에서만 보냈다. 제14기 기자직 공채 시험을 통해 내가 발을 디뎠을 당시 연합뉴스는 이름이 연합통신이었다. 1980년 이른바 전두환 신군부에 의한 언론 통폐합에 따라 기존 동양통신과 합동통신을 통폐합한 통신사가 연합통신이었다. 이 연합통신은 1998년 12월 19일 현재의 연합뉴스로 간판을 바꿔단다. 

내가 이 회사 기자로 발을 디딜 적에 공채 동기 기자는 10명이었다. 흔히 언론계 속어로는 펜대라 일컫는 일반 취재 기자가 여덟이요 나머지 두 명은 사진기자였다.

이 글을 쓰는 2016년 1월 24일 현재 나를 포함해 4명이 증발했으니 지금은 6명이 저 소굴에서 살아남아 있다. 애초 회사에서 이 공채 시험을 공시할 적에는 펜대 기자는 모두 서울 주재였다. 

한데 어찌된 셈인지, 최종 면접 과정에서 내가 포함된 2명이 지방기자직으로 발령났다. 입사 뒤 어떤 자리에서 당시 연합통신 사장 현소환에게 얘기를 직접 들으니, 내 출신을 문제삼아 부산주재 기자로 발령냈다고 했다. 예서 출신이란 가난한 농민의 자식을 말한다.

당시만 해도 면접 시험에서 노조 문제가 빠지지 않았다. 한마디로 노조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노조에서 어떻게 활동할 것인가를 묻는 것이었는데, 그런 질문에 내가 어떻게 답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현 사장의 직접 증언과 여러 정황을 종합하건대 나는 시험 성적은 좋은 편인데, 격렬한 운동권 출신이라고 의심을 했던 듯하고, 따라서 입사해서도 노조 활동을 많이 할 놈이라고 보았던 것이 확실하.

따라서 이런 전력에 따르면 떨어뜨려야 하는데 극적인 반전에 나는 기적으로 살아남아 마침내 연합통신 기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2016. 1. 24) 


***

2015년 해직 이후 2년간 낭인 생활하며 정리한 것들이라 원고들이 다 흩어져 찾는대로 하나씩 두서없이 전재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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