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 약탈해 조선총독한테 진공되어 오늘날 청와대에 갇힌 통일신라시대 불상을 어찌 해야 하는지를 둔 논란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근자 벌어지는 사태 전개는 문재인 정부 출범과 직접 궤를 같이한다. 정권 출범 직후 나는 요로를 통해 이 불상의 조속한 경주 반환을 요청했고, 그에 병행해, 혹은 그와 관련없이도 당국에서도 익히 이 문제에 관심을 보였으니, 무엇보다 역사덕후 문 대통령이 이 불상에 대해서도 유감없이 그런 면모를 발휘했으니, 이를 토대로 해서 문화재청과 서울시는 이미 정권 출범 직후 청와대 요청에 의해 당시까지는 서울시 유형문화재인 이 불상에 대한 사상 처음으로 기초 정밀조사를 벌였던 것이며, 이를 토대로 나중에는 이 불상이 급기야 보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신라사적고新羅寺蹟考가 말하는 1916년 경주 이거사지移車寺址 사정. 이에서 이르기를 "과거에 완전한 석불좌상 1구가 엄존했는데, 지난 다이쇼 2년(1913) 중에 총독관저로 옮겼다. 그 외에 목 부분에 손상이 있는 석불 1구와 후광(장식)이 있는 석불입상 1구, 석탑 1기(도괴됨) 등이 절터 부근 땅속에 묻혀 있었다"고 했다. 이에서 묘사하는 사정은 현재 남은 이거사지 사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조여래좌상으로 평가되는 이 청와대 불상은 그때까지만 해도 그 본래 위치가 경주 이거사(移居寺) 터라는 데는 이렇다 할 의문의 여지는 없었다. 이 불상이 문화재 혹은 미술품으로 재발견되어 보고되기 시작한 무렵에는 그 출처가 이거사지가 아닌 '경주 남산'으로 지목된 자료가 많기는 해도, 그것이 오류임은 이후 활발한 자료 발굴을 통해 이거사지임이 거의 다 드러난 마당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각에서는 이거사지에 견주어 경주 남산을 지목하기도 했으니, 이들이 주로 내세운 근거는 크게 두 가지였으니, 첫째가 식민지시대 경주 남산을 뿌리로 적은 각종 자료였으며, 둘째가 이른바 미술사 양식론에 착목한 것으로써, 문제의 청와대 불상과 흡사한 같은 통일신라시대 불상이 같은 경주 남산에 두어 점 보고된 까닭이었다.
이런 사정은 문재인 정부 출범과 함께 사상 처음으로 시도된 불상 현지조사로 하고, 이를 통해 그것이 일약 대한민국 보물로 승격하면서 더욱 묘한 국면을 연출했으니, 다 죽은 듯하던 경주 남산론에 불을 다시 지폈기 때문이다. 해당 문화재를 지방문화재에서 중앙정부 지정 문화재로 격상할 때는 당연히 해당 문화재에 대한 정밀조사가 따르기 마련이고, 이를 토대로 해서 해당 지자체장은 문화재청에 보물지정 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 이에 의해, 문화재청에서 이 조사를 의뢰받은 서울시는 박원순 시장 이름으로 보물 지정을 했거니와, 이에서 바로 이 불상이 본래 있던 곳을 '미상'으로 처리하고 말았다. 더욱 정확히는 현재로서는 정확한 본래 위치를 알 수 없다고 정리했으니, 그러면서도 신청서와 현지조사 보고서는 이거사지와 경주 남산으로 크게 보아 갈라진 두 견해 중에서도 실은 남산에다가 무게 중심을 두었다.
신라사적고 서지사항
서울시가 2017년 9월, 문화재청에 제출한 이 불상에 대한 '국가지정문화재 등의 지정 요청 자료보고서'는 이의 '연혁/유래/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 1913년경 총독방문 후 경주금융조합이사였던 고다이라 료조가 총독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서울 남산 총독관저(왜성대)로 불상 진상
- 1927년, 지금의 청와대 부근에 새로운 총독관저 신축되면서 불상도 함께 이전된 것으로 추정
- 1974년, 서울시 유형문화재 24호 <석조여래좌상>으로 지정
- 2006년, 불신의 일부 보존처리(수리보고서 별송)
- 2009년, <석불좌상>으로 지정명칭 변경(2009.6.4.)
나아가 이 지정신청서는 '지정가치 및 근거기준'으로는
-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4호 석불좌상은 일제강점기인 1913년 무렵 경주에서 서울로 옮겨진 상으로 통일신라 8세기 불상의 특징인 당당한 어깨와 가슴을 지녔지만, 두터운 팔과 손, 삼단사각대좌로 미루어 통일신라 후기, 9세기 무렵 제작한 것으로 판단한다. 이 석불좌상은 특이한 이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상태가 양호하고, 삼단사각대좌를 지닌 통일신라의 드문 예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 보호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라고 적었거니와, 이에서 보듯이 시종 일관 그 출처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적시하지는 않은 채, '경주'라고만 적었으며, 그것이 반출된 시점으로는 '1913년 무렵'이라 해서, 그 정확한 시점을 특정하지 못했다. 한데 이 지정신청 보고서에는 이례적인 구절이 보이거니와, 우선 '조사내용' 중에 "1917년 6월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중대석 확인- 경복궁에 있던 중대석을 2002년 춘천박물관으로 이전"이라는 구절이 있는가 하면, 다음 구절도 발견된다.
삼단사각대좌를 지닌 불좌상 가운데 양식적으로 가장 이른 예는 경주 남산에 남아있다. 대표적인 예로 남산 약수계 석불좌상과 용장계사지 약사불좌상, 양지암곡의 석불좌상 등 경주 남산에서만 3구가 있고, 대좌만 남아있는 경우도 국립경주박물관을 비롯하여 그 예가 적지 않다. 삼단사각대좌를 갖춘 이들 남산 불상 가운데 약수계의 석불좌상은 청와대 불상과 쌍둥이처럼 유사하다.
이는 이 지정신청서, 나아가 그 토대가 된 실사보고서를 누가 썼는지를 엿보게 하니, 불교미술사 전공으로 경주대학교 문화재관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임영애가 그 주인공이다. 문제의 청와대 불상 받침대 중 하나인 중대석(中大石)은 결실됐지만, 국립춘천박물관 야외에 전시 중인 어떤 불상의 중대석이 바로 이 불상의 그것이라고 주장한 이는 오직 임영애만 있을 뿐이다. 이런 주장을 나는 익히 접했으나, 고려할 만은 하나, 그것이 정답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고, 여타 미술사학도 또한 나랑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러니 설혹 저와 관련한 저런 논문이 나왔다 해도, 그것을 작성한 사람이 아니면, 저리 적을 수는 없으며, 다른 사람이 작성했다면 "춘천박물관 소장 중대석이 이 불상의 중대석이라는 주장도 있다"는 정도로 적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다.
최선일 등과 더불어 이 불상 현지조사를 벌인 임영애는 조사를 토대로 2017년 12월 발간된 한국미술사학회 기관지 《美術史學硏究》 第296號에 〈일명 ‘청와대 불상’의 내력과 의미〉라는 논문을 투고, 게재하거니와, 이 논문 다음 결론 부분을 보면, 저 보물지정 신청보고서가 어떠한 목적에 따라 작성되었는지를 엿보는데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청와대 불상은 경주 도지동의 이거사지가 원봉안처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남아있는 자료는 청와대 불상의 원봉안처가 이거사지라는 확신을 주지 못한다. 청와대 불상의 원봉안처와 관련해 가장 이른 기록인 1934년 『매일신보』 기사가 경주 남산이라고 못박아 이야기하고 있고, 또 청와대 불상과 쌍둥이처럼 같은 불상이 경주 남산 약수계에도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청와대 불상과 같은 형식의 삼단사각대좌 불상이 경주 남산에만 남아있는 것도 원봉안처가 도지동 이거사지라고 단언하기 어렵게 만든다. 또 일제강점기 경주의 절터를 상세히 조사했던 오사카 긴타로도 『경주고적급유물조서』라는 보고서에서 ‘移車寺址’를 별도의 항목으로 다루었지만, 이곳에 있던 불상을 옮겼다는 언급이 전혀 없다. 같은 책에서 경주 남산의 삼릉계 약사불좌상과 감산사 불상이 서울로 옮겨간 사실에 대해서는 명확히 적어두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오사카 긴타로가 청와대 불상에 대해 전혀 몰랐거나, 청와대 불상의 원봉안처가 이거사지가 아닐 가능성을 반증하는 것이다. 한편 1917년 『조선고적도보』 해설편에서는 청와대 불상을 ‘경주의 모처에 있던 불상’이라고 적었다. 1917년의 이 기록은 옮긴지 4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지만, 원봉안처를 밝히지 않았다. 원봉안처를 정말 몰랐기 때문인지, 혹은 출처를 밝히기를 곤란한 사정이 있어 의도적으로 ‘모처’라고 적었는지는 알 수 없다. 불상을 소유하고 있던 고다이라 자신도 원봉안처가 알려지는 일을 꺼렸을 것이니 지금 남겨진 일제강점기의 자료를 통해 원봉안처를 밝히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청와대 불상은 아픈 기억이기는 하지만, 이 또한 하나의 역사이다. 아쉽게도 지금 남아있는 자료만으로 원봉안처가 어디인지를 명확히 밝히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지만, 청와대 불상은 현재 봉안되어 있는 장소도, 그 내력도, 또 통일기 신라 불상 가운데 매우 이례적인 삼단사각대좌를 지녔다는 점에서도 특별한 통일기 신라 9세기의 불상이다.
이에서 보듯이 임영애는 시종일관 이 불상 원래 봉안처에서 이거사지를 떼어내려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보인다. 비록 그에 대해서는 여러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이런 언급 이면에 깔린 주장은 말할 것도 없이 그 봉안처는 이거사지가 아니라, 경주 남산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임영애의 생각이다.
신라사적고 서언
하지만 그의 이런 주장은 생명이 1년을 가지 못하고 말았다. 그 본래 위치가 이거사지임을 명백하게 폭로한 1916년 문건 《신라사적고(新羅寺蹟考)》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저자는 모로가 히사오(諸鹿央雄). 1908년 무렵 이후 경주를 주무대로 활동한 그는 문화재 수집가이자 나름 역사학도였고, 나중에는 금관총 발굴에 관여하는가 하면 1933년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현 국립경주박물관)이 생기자 그 초대 관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 책은 다이쇼 5년(1916)에 그가 자비 출판한 것으로, 이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과거에 완전한 석불좌상 1구가 엄존했는데, 지난 다이쇼 2년(1913) 중에 총독관저로 옮겼다. 그 외에 목 부분에 손상이 있는 석불 1구와 후광(장식)이 있는 석불입상 1구, 석탑 1기(도괴됨) 등이 절터 부근 땅속에 묻혀 있었다.
덧붙여 《신라사적고(新羅寺蹟考)》가 발견된 경위를 밝혀두어야겠다. 그 자신 경주 출신으로, 경주학을 확립하고자 했으며, 신라와 경주와 관련한 자료라면 불원이천리하고 긁어모은 고 이근직 형이 있다. 경주대 교수로 재직 중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거니와, 그의 컬렉션은 미망인인 주진옥 선생이 보유 중이다. 경주에 관한 무수한 글을 쓴 그의 글에서도 좀처럼 저 청와대 불상과 관련해서 이렇다 할 자세한 글로써 정리한 것이 없으면서도, 그 원봉안처는 이거사지라고 떠들고 다닌 점이 나로선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어떤 증거없이 저리 말할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저 청와대 불상을 이제는 볼모에서 건져내 경주 현지로 돌려보내겠다고 결심한 그 무렵, 내가 주 선생한테 신신부탁했다. "분명히 근직형이 이거사지 관련 자료를 모아놨을 것이다. 없을 리가 없다. 찾으면 바로 연락주시라." 그때 주 선생이 이르기를 "안 그래도 찾아 봤는데 없더라"고 말했다.
그렇게 잊고 지냈는데, 그제 밤, 주 선생이 전화를 했다. "찾았다"고 말이다. 저 자료를 찾았다고 말이다. 그 말을 듣고는 그랬다. "그 인간이 그런 인간이요. 분명히 있을 거라 그랬자누?"
오늘 따라 근직형이 더 그립다.
'문화재현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도 참 많이 고생한 거 같아", 어느 고고학도의 일생 (0) | 2018.10.27 |
---|---|
까마득히 잊고 지낸 청와대 불상의 추억 (0) | 2018.10.17 |
신라왕 김진흥 (0) | 2018.10.15 |
후암동 남산 기슭의 식민지시대 흔적들을 찾아서 (3) | 2018.10.14 |
신화의 영역에 들어간 훈민정음 (3) | 2018.10.1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