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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미륵사에서 맺은 인연, 선화공주를 놓지 못한 홍윤식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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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민속학자 홍윤식 동국대 명예교수 별세 | 연합뉴스

불교민속학자 홍윤식 동국대 명예교수 별세, 임동근기자, 문화뉴스 (송고시간 2020-05-29 20:23)

www.yna.co.kr

 

홍윤식洪潤植 선생은 학적學的 이력이 좀 다채롭다. 흔히 그를 불교민속학자라 하나, 저 시대를 산 직업으로서의 학문인이 흔히 그렇듯, 그렇다고 그 하나에다가 가둘 수는 없으니, 그를 중심으로 역사학자이기도 했고 국문학도이기도 했으며, 또 고고학도이기도 했다. 

 

그를 동국대 교수로 기억하는 이가 많으나, 동국대에는 1987∼2000년 역사교육학과 교수로 복무했으며, 그의 이력을 검토할 적에 우리가, 문화재업계에서 기억할 대목은 1967∼1986년 문화재 전문위원이었고, 1987∼1996년에는 문화재위원이었으며, 더구나 1974∼1987년 원광대 국사교육학과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를 지냈다는 사실이다. 

 

미륵사 석탑 해체

 

본령이 불교민속학이라 무형문화재와 인연이 깊다 하겠지만, 의외로 유형문화재에도 깊이 간여했다. 그의 이력을 보면 1980년 일본 동경東京국립문화재연구소 초빙연구원이 있는데, 이는 뭐 볼짝없이 안식년을 이쪽에서 보냈다는 뜻이다. 다른 사람들이 거대 무슨 대학 연구소에다가 이름만 걸쳐놓고 골프 쳐대고 놀러다닐 그때, 그는 뜻밖에도 동경문화재연구소를 선택했다. 

 

본래 그랬던 사람이 원광대 교수 부임과 더불어 그렇게 되었는지, 아니면 본래 그랬는데, 원광대에 부임하면서 더 그렇게 되었는지는 내가 알 수는 없지만, 원광대 시절 미륵사지에 깊이 연루하게 된다. 그 고리가 내가 알기로는 김삼룡金三龍(1925~2014)였다. 원광대의 상징처럼 통하는 김삼룡과 언제나 홍윤식은 함께했다. 

 

미륵사지는 원광대와 인연을 뗄 수가 없거니와, 그 미륵사지를 오늘날 우리가 아는 위치로 끌어올린 데가 원광대였고, 특히나 그 부설 마한백제연구소였다. 김삼룡 선생보다는 아홉살 아래인 홍윤식 선생은 연배로 보아 오늘날의 한국고고학을 만든 창산 김정기(1930~2015)와 얼추 비슷하거니와, 두 사람 인연 역시 남달랐다. 

 

봉영사리기

 

원광대 마한백제연구소가 초창기 미륵사지 발굴조사를 전담했는데, 문화재연구소장 김정기가 이렇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내가 일전에 김동현 박사께 들었다. 나는 이런저런 자리에서 더러 선생을 뵈었으나, 직접 얘기를 들을 정도의 위치는 아니었다. 

 

선생과 관련한 기억 중에 선화공주 건이 있다.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그 창건내력을 기록한 봉영사리기奉迎舍利記가 발굴되었거니와, 그에서 미륵사 창건 발원주를 "아 백제왕후 좌평 사택적덕녀我百濟王后沙宅績德女"라 적었거니와, 이 대목은 선생을 황당 그 자체로 몰아넣었다. 그 창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자세하거니와, 문제는 삼국유사에 적힌 그것과 봉영사리기 내용이 개략은 일치하나, 문제는 창건주체로 느닷없이 저를 내세웠다는 점이었다. 

 

이는 삼국유사 관련 대목을 근거로 선화공주 이야기를 써내려간 선생을 매우 황당케 했으니, 고심하던 그는 결국 이 대목을 "우리 백제왕후와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 독법에 의하면 "우리 백제왕후"는 삼국유사가 말하는 선화공주라는 것이다. 2009년에 있었던 일이다. 

 

봉영사리기

하지만 선생은 이내 이 독법을 포기하고 말았으니, 이런 독법이 "오류"라고 인정하면서 이 구절은 "우리 백제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이시니"로 읽어야 한다고 교정했다. 뭐 삼척동자도 이리 읽을 것이로대, 그렇다면 왜 이를 모를 리 없는 선생은 이리 읽고자 했을까? 

 
그 까닭은 선생 본인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서동요의 역사적 사실을 성급하게 강조하려 한 데 기인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가 선화공주를 버렸을까? 그는 결코 이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미륵사 발원 주체로 선화공주를 내세운 자신의 주장이 너무 많았고, 그런 그에게 선화공주는 교정이 불가능한 신화였고 종교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리봉안기에 보이는 석탑 발원주체가 선화공주가 아닌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백제 왕후가 된다 해서 "서동과 선화공주에 관련된 서동요의 역사적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고 믿"는다. 

 

청동합

 

선화공주를 포기할 수 없던 그가 갔다. 우리 공장 DB에 오른 그의 이력을 정리한다.  

 

홍윤식 洪潤植 HONG Yoon Sik
생년월일 (양력)1934년 12월 28일
직장/직위 동국대학교 역사교육학과 명예교수
전직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교장

성별 남성
별칭 ㆍ아호 : 蓮史
출생지 경남 산청

학력 
1955년 해인고졸
1961년 동국대 한국사과졸
1972년 일본 京都 佛敎大 대학원 불교학과졸
1977년 불교사학박사(일본 京都 佛敎大)

 

홍윤식


경력 
1963∼1969년 국악예술학교 교사
1967∼1986년 문화재 전문위원
1974∼1987년 원광대 국사교육학과 전임강사ㆍ조교수ㆍ부교수
1980년 일본 東京국립문화재연구소 초빙연구원
1982년 일본 佛敎大 교환교수
1983년 서울시 문화재위원
1987∼1999년 경기도 문화재위원
1987∼1996년 문화관광부 문화재위원
1987∼2000년 동국대 역사교육학과 교수
1991년 일본 龍谷大 객원교수
1995∼2000년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장
1995년 同박물관장
1999년 한국전통예술학회 회장
2000년 동국대 겸임교수
2000년 일본 불교대 객원교수
2001년 서울국악예술고 교장
2001년 전통예술보존협회 초대 회장
2003년 동국대 명예교수(현)
2003년 일본 기후성덕학원대 객원교수
한국불교민속학회 회장(현)

 

상훈 
우현상(1988)
기산국악제전위원회 박헌봉 국악상(2012)
대한불교조계종 불자대상(2019)

 

저서 
'한국불교'(1973)
'한국불교의례연구'(1973)
'한국사'(1974)
'불교와 민속'(1980)
'한국佛畵의 연구'(1980)
'정토사상'(1981)
'고려佛畵의 연구'(1984)
'삼국유사와 한국고대문화'(1985)
'한국의 불교미술'(1986)
'한국불교사의 연구'(1988)
'극락도'(1989)
'佛畵'(1989)
'만다라'(1992)
'한국불교의 밀교적 특색'(1995)
'불교 의식구'(1996)
'불교 미속학의 세계'(1996)
'한국의 가람'(1997)
'한국문화유산의 전통과 향기'(2000)
'한일전통문화 비교론'(2004)
'연사 홍윤식의 불교문화기행'(2019, 동인)
'회상, 고려불화전(編)'(2019, 집옥재)

 

번역 
'일본문화의 뿌리를 찾아서'(2003)

 

논문 
'불교축제 삼회향 놀이의 기원과 전개'(2004)
'경천사십층석탑의 불교사적 연구'(2006)
'한중일 공통기저문화와 현대적 의의:동아시아의 새로운 지역 아이덴티티 형성에 과한 실증적 연구'(2007)
'불교미학에 있어 정토와 자비의 개념'(2007)

 

종교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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