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재현장

박정희시대 문화재 특종을 일삼은 기자 우병익

by taeshik.kim 2019. 1. 26.
반응형

January 25, 2017 내 페이스북 계정에 나는 아래와 같이 썼다. 


경주박물관 도교 강연을 마치고 저녁을 겸해 우병익 기자를 인터뷰했다. 1933년 경주산, 1950년 7월 15일 육이오 학도병 1기, 열여섯에 좌익들에게 아버지를 잃었다. 1962년 한국일보 입사 이래 1980년 신군부에 의한 언론 통폐합으로 연합통신으로 옮겨 1985년 정년퇴직하면서 기자를 떠났다. 33년에 달하는 기자생활을 오로지 경주 주재로 있었다. 자칭 타칭 '동해안 특파원', 커버하는 지역이 북으로 울진, 동으로 울릉도까지였기 때문이라 한다.


그는 한국 언론사에선 문화재 전문기자 선두에 속한다. 경주관광개발 당시 내내 문화재 발굴현장 취재를 도맡아 각종 특종을 낚아냈다. 1970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문명대를 대동하고는 반고사 석탑 조사에 나섰다가 현지 주민 최경환의 제보로 울주 천전리 서석을 발견하고는 이듬해 1월 1일 신년 한국일보에 이를 특종 보도했다.


그의 보도는 이 날짜 자동 일면 톱인 대통령 연두교서를 사이드로 밀어낼 정도로 위력이 컸다. 중앙정보부는 이 지방판 한국일보를 보고는 압력을 넣어 서울판에선 기어이 연두교서를 톱으로 내세운다. 올해 여든 넷이란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한 그에게서도 짙은 고독이 묻어나 듣는 이가 찡하더라. 


비명에 간 아버지 얘기를 할 때나 이젠 남은 친구도 없단 말이 특히 그러했다.


"나도 김태식이란 이름 여러 군데서 들었다. 이제야 만나는구나." 


하면서 반가이 맞았다. 우병익 인터뷰는 삼월호 월간 문화재사랑에 투고할까 한다. 





이렇게 해서 그의 인터뷰는 문화재청 발간 월간지 월간문화재사랑》 2017년 3월호에 실제로 실렸으니,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이 기고문에서 내 소속이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언론인'으로 된 까닭은 당시 나는 박근혜 정권에 복무한 박노황 경영진에서 해고된 상태였던 까닭이다. 



이번 인터뷰가 문화재청 월간 소식지 <문화재사랑>에 실린다는 말에 선생은 대뜸 나선화 문화재청장 얘기를 꺼낸다.


“진홍섭 선생 제자 아이가. 이화여대 사학과 있을 때 같이 답사를 많이 했지. 황수영·진홍섭·정영호 선생하고.”


나 청장이 1949년생이니, 대학생 때라면 대략 45년 전쯤일 것이다. 올해로 여든넷이라는 고령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가 또렷한 우병익 선생은 한국일보 경주 주재 기자로 문화재 현장을 누비던 그때가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듯했다. 그에 의하면 황수영·진홍섭·김원룡 선생 같은 이들은 문화재 현장에서 그에게 역사 안목을 길러 주었다고 한다.


한국 언론사에서 문화재 전문기자로 이만큼 이름을 날린 이가 또 있을까? 그는 1962년 한국일보 기자로 발을 디딘 이래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언론이 통폐합되면서 연합통신(현 연합뉴스)으로 직장을 옮겼다가 1985년 언론 일선에서 물러났다. 고향을 떠나 장기간 생활해 본 적이 없는 천상 경주 토박이인 선생은 기자 생활도 경주 주재만 했다. 물론 담당하는 지역이 경주만이 아니라 포항·울진·영덕·울릉도까지였으므로 이런 그를 ‘동해안 지역 특파원’이라 부르기도 했다.


기자로서 문화재에 첫발을 딛다


언론인 생활에서 그가 특히 주력한 분야는 문화재였다. 신라 천년 고도 경주를 기반으로 삼는 지역 주재 기자였던 데다, 마침 박정희 정부가 문화재 분야를 정책적으로 키운 영향도 있다. 그는 한국일보가 1960년대 기획한 대규모 문화재 프로젝트인 신라삼산오악학술조사 사업 최일선에서 활약하면서 영천 청제비 발견과 같은 건을 단독 보도했는가 하면, 1970년대 박정희 정부가 추진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서는 대규모 고고학 발굴현장의 각종 특종을 주도했다.


“그 전까지 누가 문화재를 쳐다보기라도 했나? 한국일보가 주도했고, 문화재를 정책적으로 키운 거지. 사실 한국일보가 언론사로 급성장한 것도 따지고 보면 문화재 때문이야. 다른 언론사에서 신경도 쓰지 않던 문화재 분야를 얼마나 크게 다루었는데.”


이 과정에서 (같은) 조간신문인 조선일보와 그야말로 매일매일 박 터지는 특종 싸움을 했다. 우 선생은 한국일보 창업주인 故 장기영 사장과의 인연을 잊지 못한다.


“내가 한국일보 들어갈 때는 공채란 게 없었어. 면접을 보고 들어갔는데, 장 사장이 직접 기자를 뽑았어. 나를 얼마나 아꼈는지 몰라. 장 사장은 하루 25시간을 일한다고 했어. 밤늦게까지 편집국을 떠나지 않았지. 당시에는 기사를 전화로 부를 때야. 경주에서 전화로 기사를 부르면 편집국 당직 기자가 그걸 받아서 쓴단 말이지. 한데 문화재 용어를 모르잖아? 한자도 많고. 그걸 장 사장이 본 거야. 그러더니 대뜸 당직 기자를 보고 ‘누구야?’라고 하기에 ‘경주 우병익인데요’라고 대답하니, ‘그래? 그럼 나한테 바꿔’ 하고는 당신이 직접 기사를 받아썼어.”





문화재가 있는 현장, 잊을 수 없는 특종


그의 뇌리에 깊이 박힌 문화재 특종 중 하나가 울주 천전리 각석(국보 제147호)의 발견이다.


“(발견 날짜가) 1970년 크리스마스이브였어. (그 직전에) 문명대 교수한테서 연락이 왔더라고. ‘선생님, (우리 동국대) 불적(佛跡)조사단이 반고사(磻高寺)를 가는데 차편 있겠는지요?’라고. 그때는 군대 차량밖에 없을 때야. 마침 육군 보안대장이 내 친구라서 군용 지프를 빌렸지. 그래서 지프에 나랑 문명대, 그리고 문교수 조교랑 현장을 간 거야.”


문명대 교수는 그 전 석굴암 보수 공사 때 안면을 텄다고 한다. 황수영 박사가 이 보수 공사에 관여할 때 문 교수도 현장 조사원으로 참여했던 듯하다. 반고사란 지금의 천전리 각석 근처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절터이다.


“김태식 씨, 반구대 가 봤지? 마을 입구에 다리 하나 있잖아. 거기서 50m 정도 더 들어가면 그 마을에 집청정(集淸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집청정 주인이 최경환 씨라는 분이야. 그분이 반고사터로 우리를 안내했지. 한데 반고사 터에 가보니깐 탑 부재 몇 개만 있는 거야. 에이, 하고 한참 실망해 있는데 최경환 씨가 그러는 거야. ‘저쪽 바위 면에 사람 얼굴도 있고 짐승 그림도 있고, 글자 같은 것도 있다’고 말이야.”


이에 놀란 우 선생과 문 교수는 최 씨가 말한 바위 현장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가서 보니 시커먼 암벽에 이끼가 잔뜩 끼어서 뭐가 있는지 분간할 수가 있어야지. 그런데 천전리 앞 개울가에 헝겊 조각이 흘러내려 와 있는 거야. 문명대가 그걸로 물을 묻혀서 바위 면을 문지르자 이끼가 벗겨지기 시작한 거지. 한겨울에 추위도 무릅썼어. 천전리 각석은 그렇게 해서 발견됐지.”


문화재 발견에 들떠 현장을 빠져나온 우 선생과 문 교수는 각각 발견 사실을 보고했다. 문 교수는 황수영 박사한테 전화로 알리고, 우 선생은 서울 본사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보고했다. 이를 통해 두 사람은 신사협정을 했다. 1월 1일 신년을 기해 공개하기로. 그렇게 해서 우 선생은 이날 한국일보 1면 머리기사로 ‘신라화랑 유적 발견’이라는 특종을 보도했다.


“1월 1일은 모든 언론이 박정희 대통령 연두교서를 1면 톱으로 실어야 해. 한데 내 기사가 대통령 연두교서를 옆으로 밀어내고 톱기사로 실린 거야. 한국일보는 조간이었으니깐 지방판이 먼저 나오잖아? 그걸 중앙정보부가 보고는 난리가 났지. 이게 무슨 기사라고 감히 대통령 연두교서를 1면 톱에서 밀어냈냐며 한국일보에 압력을 가했어. 그래서 서울 최종판에서는 내 기사가 연두교서 옆으로 밀린 거야. 천전리 각석 발견을 전하는 당시 기사를 소개하는 자료를 보면 전부 서울 시내판이더라고.”


그는 신라 천마총 발굴 중 출토된 금관도 특종으로 보도한 바 있다. 대신 천마도 발견은 “조선일보에 물을 먹었어”라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금관 출토 정보 제공자가 누구인지 물었더니 한사코 입을 봉한다. “아직 살아있어”라는 말과 더불어.


글+사진‧김태식(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언론인)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