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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보유: 기본적으로 큰 오류가 없던 미군정-이승만 정권의 교육 정책

by 초야잠필 2023. 3.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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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글의 보유를 쓴다.

앞에서 국대안 파동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본편에서도 썼지만, 필자의 이에 대한 입장은 분명하다. 

국대안 파동으로 비록 얼룩졌지만, 국대안 자체는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당시 신생독립국으로서 가용한 재원을 박박 긁어모아 제대로 된 학사위를 줄 수 있는 국립종합대를 하나 만들자는데 그걸 반대하면 다른 대안은 있는가? 

결정 과정에서의 미군정의 독단. 이런 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며 정책 자체의 내용에 대한 부분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국대안 파동 당시 소위 우리나라 "국립대학" 교수 중에 해방 전부터 그 대학 교수였던 사람은 거의 없다.

모두 해방 이전에는 일본인들 때문에 밀려 있다가 해방 이후 비로소 교수가 된 분이 대부분이었는데, 당시 우리나라 인재풀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겠지만, 안정된 대학교육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할 수 있다. 

이전에 올려 놓은 국대안 이전 국공립 대학 모습을 보면 안다. 

 

국대안 직전은 국공립대학. 경성제대가 경성대학으로 바뀌고 해방이전 전문대학이던 곳이 모두 대학으로 바뀌었지만, 숫자만 많았지 모두 함량미달이었다 할 수 있다.

 
국공립대학이 이 모양으로 난립해 있는데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이대로 놔둬라 라는 건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소리하고 같은 것이다. 

미군정뿐 아니라 이승만시대, 하면 무능과 부패로 얼룩진 시대라는 선입견이 있어, 우리나라의 제대로 된 경제개발은 1960년대에 시작되었다는 생각도 있지만, 실제로 이승만 정권 당시 정책을 보면, 적어도 교육분야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던 부분이 꽤 많다. 

1960년대 한국경제 도약은 이승만 시대가 없었다면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승만 시대 최대의 공적은, 한국의 교육을 식민지형에서 독립국가형으로 성공적으로 바꾼 것이다. 

그것도 돈 몇 푼 없이.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겠다. 

 
*** previous or related article *** 

 
대한민국의 50-70년대 (6): 국대안 파동 (2)
 

대한민국의 50-70년대 (6): 국대안 파동 (2)

국대안 파동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에 대해서는 인터넷 서칭만 해도 다 나오기 때문에 많이 적지 않겠다. 여기서는 국대안 파동 진행과정에 대한 약간 언급과 함께 그 결과만 다루고자 한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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