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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대한민국의 50-70년대 (5): 국대안 파동 (1)

by 초야잠필 2023. 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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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대안 파동이라는 것이 해방 직후에 있었는데 여기 관심 없는 분들은 잘 모를 것이다. 

이 사건은 해방이후 남북분단, 좌우대립에 촉매제 역할을 한 사건인데, 대학교육 분야에 미친 영향도 매우 컸다. 

요약하면 이렇다. 

미군정은 1946년 7월, 종전의 한국 내 대학과 전문학교를 묶어 "국립서울대"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대학이라 해 봐야 해방 이전의 경성제대-해방이후 경성대 딱 하나였고, 나머지 국립 전문학교는 각 분야별로 있었는데 이를 모두 단과대학별로 해체모여 하여 "국립서울대"라는 단일 체제로 정리하겠다는 것이어었다. 

이 국대안파동은 현재 사학계에서 내린 평가가 필자가 보는 한 별로 공정하지 않다. 

일단 남북분단 책임을 미국에 있다고 보는 시각이 은연중 투영되어 있는 저작이 많고, 국대안 파동이 미군정의 근거없는 밀어붙이기로 일어났다는 시각이 주류이다. 그리고 오랜 전통의 대학을 조선인과의 합의 없이 별다른 이유도 없이 한데 묶으려 한 미군정의 폭거라 한다. 결국 이런 요지가 되겠다. 

이는 지극히 한쪽으로 치우친 시각이다. 국대안이 제기된 동기를 필자가 이야기 해 보자면 이렇다. 

1. 필자의 앞글에서 말했지만 미군정은 한국의 대학교육 역량은 바닥까지 달달 긁어 만들어도 미국 주립대학 하나의 역량도 안 될 정도라고 판단했다고 본다. 이런 상태에서 전문학교를 대학으로 바꿔 봐야, 독립 단과대학이 되는 것인데 그럴 바에는 차라리 종합대학의 단과대학으로 편제하는 미국식 대학으로 전환하는 것이 낫다고 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판단 자체는 오류가 없다고 본다. 앞에서 예를 들었지만 당시 우리나라 서울대에는 박사학위가 없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기본적으로 대학교육을 조선인 손으로 유지할수 있는 역량자체가 너무 허약했다.   

2. 국대안파동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되었던 것은 경성제대 후신인 경성대와 해방전 경성의전 후신인 서울의전을 합쳐서 "국립서울대학의 "의과대학"으로 개편한다는 문제였다. 여기서 경성제대와 경성의전 출신간 싸움이 발생했는데 가장 큰 문제는 학위였다. 해방전, 우리나라에서 "학사학위"를 줄 수 있는 대학은 경성제대 외에는 없었다. 그러면 다른 전문학교 (경의전, 연희전문, 보성전문 등)는 무슨 학위를 받았느냐. 학사학위가 아니라 "득업사"를 인정했다. 득업사란 학위가 아니라 "diplom"이다. 

따라서 한국에서 전문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은 원칙적으로 학사가 아니었고, 그때문에 박사학위를 목표로 공부를 계속하는것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했다. 

연희전문을 나온 윤동주가 일본 도시샤대학으로 유학을 갔는데, 그는 그 대학 학부로 진학했다. 도시샤대학은 당시 전문학교가 아니라 "대학"으로서 정식 학사호를 부여하는 대학이었다. 따라서 국내에서 전문학교를 졸업 한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 대학에 진학하여 학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많았다. 

예를 들어 이병도 선생. 이 양반은 보성전문을 졸업 한 후, 일본 유학을 가서 와세다 대학에서 "학사호"를 취득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이병도 선생은 해방 당시까지도 최종학력은 와세다대 문학사였다. 

같은 사학과 유홍렬 선생을 보자. 이 분은 경성제대 출신으로 "학사호"를 취득했지만, 졸업후 3년간 같은 학교 조수 생활을 한 것이 해방 이전 경력의 끝이었다. 

다음으로 강진철 교수의 예를 보자. 이 분은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 (해방전 경기고)를 졸업했으며 바로 게이오 대학 사학과에서 문학사호를 취득하였다. 

한국 사학계 3거두라 할 세 분의 해방전 교육의 경력이 어째서 이렇게 다를까? 

이는 소위 해방전 일본의 구제교육 시스템이 매우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조선의 구제 전문학교 (경성의전, 연희전문, 보성전문)는 대학입시를 보는 자격의 측면에서는 당시 "고등학교 (조선의 경우 공립고등보통학교)"의 학력 수준으로 인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연전, 보전, 의전은 당시에도 조선의 최고 수재들이 가는 학교들이었지만, 일본의 교육체제하에서는 이들은 "고졸"이었던 셈이다. 

 

일본의 전쟁 전 교육제도 (왼쪽). 고등학교와 전문학교가 같은 급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연전, 보전, 경의전 등은 졸업해도 학사호를 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인 의사에는 "학사호"를 가진 의사 (경성제대 출신)과 "학사호"가 없는 의사 (경의전 등 의학전문졸업생)이 섞여 있는 상황이었다. 이 중 박사과정으로 바로 진학이 가능한 사람은 학사호가 있는 대학 졸업자여야 했다. 원천적으로 조선의 교육제도가 대학 1개에 몇 개의 전문학교로 돌아가는 한 대학교육을 제대로 유지할 수 있는 교원의 양상이 원천적으로 막혀 있었던 셈이다. 조선의 대학들이 (전문학교 포함)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일본인 교수로 채워질수 밖에 없는 구조적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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