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는 불교국가라 해도 다름이 없으니, 이른바 정통 유학자라는 자 중에는 시대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요즘 한국사회 일부 개독이 여타 종교에 대하여 취하는 발본색원적인 사상을 지닌 이도 없지는 않았지만, 이는 찻잔 속 태풍이라 대부분은 불교에 대하여 관대했으며, 양교 조화를 꾀했다.
하지만 조선왕조가 건국하면서, 그 건국 주체 세력이 성리학으로 무장한 이 천지라, 주희라는 요망한 이는 그 자신 중 노릇을 했으면서도 불교에 대해서는 불구대천 원수로 삼았으니,
그를 조술한 자들은 신통방통하게도 고려가 멸망할 수 밖에 없으며, 조선이 건국할 수밖에 없던 정당성을 불교에서 찾았으니. 그리하여 불교에 대해서는 시종하여 부패의 온상으로 지목하여 그것을 퇴출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한데 우리가 이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종래 불교가 수행하던 다양한 역할 중의 하나가 광장 정치였으니, 이 광장 정치가 비익秘匿을 근간으로 삼는 동아시아 전통 군주론에서는 그 유일한 돌파구였다는 점이거니와,
그런 숨통 막히는 비익형의 전통에서 불교는 군주를 신민에게 드러내는 광장 정치의 유일한 창구였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유교가 적어도 지배권력에서는 유일한 이데올로기로 자리잡음으로써 그에 둘러쌓인 군주는 더더구나 구중심처 궁궐로 숨어버리기에 바빴으니, 이 점은 두고두고 근대국가 혹은 시민성의 창발에 발목을 잡게 된다.
나는 일전에 동아시아 군주론에 견주어 그리스 로마 그리고 페르샤 전통의 군주상은 공개형이며, 그것의 단적인 증거는 화폐에다가 군주의 얼굴을 새김을 들었거니와
은닉형 비익형 군주 국가에서는 군주는 뒤로 숨기에 바빴으니, 조선시대 그 어떤 왕실 연향 그림에도 임금 자리에는 임금이 없고 덩그러니 일월오봉도 그림이 그 차지가 되는 까닭에 이에서 말미암는다.
한데 그러한 은닉형 문화에서 불교는 위대한 반란자였다. 불교는 한편에서는 은닉형 수도자를 자처했지만, 그 한편에서는 대중과의 끊임없는 교감, 그리고 떼거리 정치를 표방했으니, 그들이 무수하게 내세운 각종 도량道場이 광장 정치의 표상이었다.
불교 국가에서는 이런 도량이 툭하면 있었으니, 그에 더불어 반승飯僧이라는 제도가 있어 이런 모임은 참가자 규모가 최소 1만명이라, 이에다가 수십만이 참가하는 연등회라든가 팔관회는 그 자체가 왕의 시혜로 간주되었으니, 그런 문화권에서 왕은 자주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선의 건국은 카니발 문화의 상실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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