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히 우리 동네 기준으로 보면, 비닐하우스라는 신문물이 들어오기는 70년대 중반이다. 내가 왜 이걸 기억하는가 하면, 국민학생이던 그때 비로소 비닐하우스가 들어와, 내가 신기해서 구멍 뽕뽕 뚫었다가 엄마한테 부지깽이로 열라 얻어터졌기 때문이다.
이 비닐하우스는 말할 것도 없어 여러 모로 농업혁명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신기하게도, 이농 탈농현상이 극심화한 그 시절에 들어와서는 이제는 농업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기반시설으로 정착했다.
신기했다. 이 비닐하우스는 물론 대낮 기준이기는 해도 한겨울인데도, 그 안에는 그리 따뜻했다. 이럴 수 있냐 신통방통한 기억 지금도 생생하다.
물론 비닐하우스 내부는 그 특유의 냄새 혹은 기운이 있다. 약간 텁텁한 그런 기분에다가, 지금 생각하니 공기가 통하지 않으니, 그에서 비롯하는 그 특유의 땅 냄새, 땀 냄새가 있었다.
한반도에서 삶은 곧 우풍과의 싸움이었다. 한데, 그런 우풍을 이 얇은 비닐 한장이 없애주었다. 비닐의 이런 힘을 확인한 사람들은 이내 비름박에다가도 붙이기 시작했다.
겨울 문고리는 쩍쩍 눌어붙었다. 구들 방구석은 아랫목만 그런대로 버틸 만했고, 그것도 그 아랫목만 드글드글 끓어 거기는 장판지가 타서 새까맸고, 그런 아랫목에 솜이불 덮어쓰고 누워도, 입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났다. 그런 우풍의 침략을 비닐하우스 치고는 남은 비닐들을 온 비름박에다가 붙이고서는 우풍을 차단하고자 참말로 무던히도 힘쓰곤 했다.
저주받은 한반도는 제때 와줘야 할 비가 오지 않고, 내리지 아니해야 할 시절에 비를 쏟아붓곤 했으니, 그에 더불어 기온조차 영 맞지 아니해서, 제때 모종을 해야 제때 수확을 하지만, 그런 제때는 좀처럼 없었다.
농사는 때가 있다. 모내기도 철이 있어 그 철이 지나면 벼가 여물지 아니해서 쭉정이만 양산한다.
나 역시 그렇지만, 벼는 희한해서 푹푹 쪄야, 그런 날씨가 장기지속해야 제대로 익는다. 그렇게 익으면 뭐하는가? 태풍이 들이닥치면 또 말짱 도루묵이라, 뭐 하나 제대로 작동하는 시스템을 내가 보질 못했다.
그렇게 해서 풍년이 들면? 이건 또 다른 고통이다. 풍년은 물가폭락을 의미한다. 그 폭락은 농민들한테는 비극이다. 다나네기 농사가 잘 되면 온 들판이 썩어가는 다나메기 냄새도 진동을 한다. 팔리지 않기 때문이다. 팔려도 이문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한데 비닐하우스 도입은 그런 농업의 불규칙을 일거에 타진해 버렸다.
물론 그것이 만능은 아니었으되,
또 그것이 천수답의 숙명을 해결하지는 못했으되
그런 대로 시간과 규칙을 갖추게 했으니,
비닐하우스 도입이야말로 경운기의 그것과 더불어 농업에는 혁명이었다.
물론 그 광범위한 도입은 온 국토를 비닐 공해단지로 만들어버렸지만, 그런 건 거둬서 태우는 수밖에 더 있겠는가?
***
비닐하우스는 제때를 선사한 농업혁명이었다.
한국농업은 비닐하우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물론 이 제때는 엄밀히는 속성을 의미하는 비극을 잉태했다.
그런 점에서 비닐하수는 제때이기도 했으면 속도위반이기도 했으니
제철음식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한 폭군이었다.
폭군으로서의 비닐은 추후 다른 기회를 엿보고자 한다.
'역사문화 이모저모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장斷腸의 미아리彌阿里 고개 (1) | 2020.05.24 |
---|---|
서울탈환을 알리는 삐라 Leaflet Announcing Recapture of Seoul (1) | 2020.05.24 |
양말 벗은 구릿빛 박세리 발목은 하얬다 (1) | 2020.05.23 |
대한민국 초대 내각 (2) | 2020.05.23 |
월성 성벽을 깔고 누운 시체들(1) 순장殉葬에서 순사殉死로 (2) | 2020.05.2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