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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월성 성벽을 깔고 누운 시체들(1) 순장殉葬에서 순사殉死로

이 둘을 구분 짓는 결정적인 차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죽음의 자발성이다. 주군主君 혹은 낭郎과 같이 주인 되는 위치에 처한 사람이 어떠한 이유로써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을 보고는 그 수하 혹은 배우자 되는 사람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일을 순사라 하고, 그에 견주어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 主人 되는 사람을 사후 봉양 혹은 숙위하는 차원에서 타인의 의지에 의해 죽임을 맞이해 그 주인되는 자와 함께 묻히는 일을 순장이라 한다. 하지만 이 둘은 실제로는 구분이 모호한 경우가 적지 않았으니, 그것은 무수한 역사의 실례가 그것을 증명한다.

 

창녕 송현동 15호분 순장 인골



《삼국사기》 권제 47, 열전 제7이 입전立傳한 인물들은 실은 순장 열전이면서 순사 열전이다. 이들의 죽음을 순장이라 할 것인가 아니면 순사라 할 것인가? 나는 그 모호한 구분을 칼로 무를 자르듯이 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 자, 이쯤이면 이제 우리는 순장과 순사를 어쩌면 한 통속으로 접근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지남자 같은 방향타를 발견한다.

순장과 관련해 가장 흔히 논급하는 대목이 신라 지증왕에 의한 순장 금지 조치다. 《삼국사기 신라 지증왕본기에 이르기를 “3년(502) 봄 2월, 令을 내려 순장을 금했다. 이전에는 국왕이 훙薨하면 남녀 각 다섯 명씩 순장했다가 이때가 되어 금하게 된 것이다.(三年 春三月 下令禁殉葬 前國王薨 則殉以男女各五人 至是禁焉)”라 하거니와, 실제 이는 신라 고고학 발굴 성과와도 대략 맞아 떨어진다.

예컨대 주 피장자가 누구인가 하는 논란은 극심하지만, 지증왕 시대 이전 어느 왕 혹은 그에 준하는 자의 부부 쌍분임은 분명한 황남대총은 순장 흔적이 뚜렷이 드러났다. 다만 그 숫자는 논란이 있어 그에 대해서는 황남대총 남분 발굴보고서 보고자 이은석의 선행 연구가 있으므로 그에 맡기기로 한다. 나아가 지증왕 시대 이전 순장 사례는 신라의 직·간접 영향권 아래 있던 창녕 등지의 지배자급 무덤에서도 활발히 확인되는 중이다.

 

복원한 송현동 15호분 피순장자 송현이. 16살 소녀다. 



현재까지 신라 혹은 가야 고고학 성과를 종합할진대, 지증왕 시대를 고비로 순장이 법적으로 사라진 흔적은 완연하다. 이런 점에서 그가 순장을 금했다는 《삼국사기》 증언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한다고 믿어도 좋다.

그렇다면 왜 신라는 하필 저때에 이르러 순장을 금지했던가? 첫째, 그 직접 계기로 전왕인 소지왕의 장제葬祭를 지적해야 할 듯 싶다. 저 순장 금지 조치가 나온 시점은 지증왕 재위 3년 봄 2월이다. 그것이 반시된 시점이 새해의 시작과 연동하는 봄 2월이라는 점을 미루어볼 때, 순장 금지와 관련한 율령은 새해를 시작하는 의미를 동시에 내포했음에 틀림없다. 그런 점에서 저 금순장禁殉葬은 소지왕 매장 직후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다시 말해 저 조치는 소지왕을 최종 매장하면서 이제부터는 순장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거니와, 순장은 소지왕을 마지막으로 삼고 향후 나부터는 순장을 하지 말라는 뜻을 담았다고 보는 편이 좋다고 나는 본다.

다음으로 순장 금지를 흔히 새로운 사상 흐름과 연동하거니와, 살생을 엄격히 금지하는 불교의 도입 확산 여파를 생각할 수도 있고, 그에 더불어 공자의 생각도 이제는 통치 이념 중 하나로 자리잡기 시작한 증좌로도 볼 수 있다. 저 무렵에 아마도 순장을 인본주의에 배반한다는 생각이 신라 사회에 널리 퍼지지 시작했을 것이다. 불교는 신라 사회 공인이 지증왕 다음인 법흥왕 시대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이미 눌지왕 시대 이래 널리 펴지기 시작했다. 공자는 순장을 증오했다. 심지어 그는 순장을 대신한 인형人形 부장도 경멸했다.

 

월성 성벽 아래에서 발견된 인골



그렇다면 순장은 그 전통이 순장 금지 율령으로 일시에 사라졌는가? 얼토당토 않은 얘기다. 그 이전까지 적어도 수백 년은 지속되었을 순장이 임금의 말 한마디로 완전 단절되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저 율령 뒤에도 한동안은 아마 음성적으로 순장은 한동안 지속되었을 것이며, 나아가 그 율령이 느슨해지는 상황도 생각할 수 있거니와, 그때 다시 살아났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한데 우리가 비상히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순사殉死다. 순장이 사라지지거나 현격히 종적을 감추는 대신, 순사가 그 대체물로써 급속히 등장하기 시작한 증좌가 곳곳에서 감지된다는 것이다. ( May 21, 2017 at 11:56 A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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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경주 월성을 까디비는 과정에서 그 체성벽 아래에서 인골을 발견한 일이 대대적으로 언론을 탔거니와, 나 역시 직후 현장을 답사하면서 감발한 바가 적지 아니해서, 이참에 저와 관련한 일단의 글을 초하고 싶다는 감흥이 절로 일어나 저리 손을 대기 시작했거니와,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던지고 말아, 이내 흐지부지하고 말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