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중국의 당대, 한국의 통일신라말, 일본의 헤이안 말 이후 공통의 과제는
토지에 대한 공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출현하는 사전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였다고 할 수 있다.
이 혼란을 그대로 놔두게 되면 결국 벌어지는 사건들이
당말의 혼란
라말여초
그리고 헤이안 말의 무가의 등장
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사안의 심각성은
그렇게 불거져 나온 사전들이 무력과 결합하면서 출현한다는 것이다.
중국 오대시기의 절도사 체제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양상의 혼란이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라말여초 호족의 대두가 동네 농민들 끌고 다녔다고 생각하는가?
그 밑에는 자기 토지를 가지고 싶어하는,
그래서 무력을 끼고 다니는 동네 건달들, 아니 신흥 무인세력이 있었다.
이들이 호족 밑에서 이를 옹립하여 떠 받드는 것이다.
같은 모양의 사회가 바로 일본에서도 무가의 대두인데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므로 더 언급하지 않겠다.
일언이폐지하고
바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에 따라
한국, 중국, 일본 사회의 이후 모습이 크게 달라졌다.
중국은 강력한 전제왕권을 토대로 한 사대부사회로 발전하였고
일본은 잘 알다시피 무가정권으로 달렸다.
한국은?
문제는 한국이다.
이 점을 우리는 파고들어야 한다.
반응형
'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제와 고려군의 전투: 입표立標란 무엇인가 (1) | 2024.01.07 |
---|---|
고려군은 나노리名乗り를 했을까? (0) | 2024.01.07 |
일본의 석고제石高制와 병사 수, 그리고 훈련도감 (0) | 2024.01.07 |
고려시대는 무과가 없다 (1) | 2024.01.07 |
육십이후의 전략 (0) | 2024.01.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