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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적어둔다.
일본의 석고제石高制에서
1석은 남성 성인 1명이 1년간 먹는 쌀의 양이다.
막번시대 일본에서 가장 큰 번이 가가번加賀藩이었다고 하는데
가가번은 호왈 가가백만석이라고 해서
백만석짜리 번이었다고 한다.
이대로 믿어 본다면 이 번에서는
백만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병사 수는 어떨까?
100석당 병사 1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가가번의 경우 가용 병력은 1만 명인 셈이다.
조선후기 훈련도감군은 병력 증감이 있었는데
대략 5천명선이었다고 하니 일본으로 친다면 50만석 짜리 번이 유지할 수 있는 직업병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당시 파악하고 있는 인구가 6백만선이었다고 감안하면,
국가에서 6만 병력은 유지가 가능해야 했을 것 같은데,
조선시대 오군영이 그렇게 국가에 막대한 경제적 부담이었던 점은 어찌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인구가 많아도 그만한 병력이 나올 수 없다면
결국 1인당 생산이 적었다고밖에 볼 수가 없는데
과연 그런 것일까?
***
조선시대 군인은 직업군인 아닌 징발병들은 근간이 자급자족이었다.
본가에서 다 댔다. 먹을 건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피복은 알아서 마련했다.
그러니 아들 있는 집은 등골이 더 휘었다.
석고제石高制에 대해서는 앞선 다음 글 참조
고쿠다카(석고제)를 쉽게 이해 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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