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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詩 & 漢文&漢文法

새해엔 옹근 나이 예순이 되니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9.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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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 계절의 노래(266)

제야(除夜) 

[唐] 백거이(白居易) / 김영문 選譯評




병든 눈에 잠 적은 게지
밤 새는 건 아닌데

감상 많은 노인 마음
또 봄을 맞이하네

등불도 다 꺼지고
하늘이 밝은 후면

곧 바로 옹근 나이
예순 살이 된다네

病眼少眠非守歲, 老心多感又臨春. 火銷燈盡天明後, 便是平頭六十人.



나는 새해에 내가 태어난 해를 기준으로 마지막 육십갑자를 맞는다. 나는 경자년(庚子年)에 태어났으므로 새해는 기해년(己亥年)이 되고 예순하나가 되는 다음 해에 다시 경자년이 된다. 갑자가 다시 돌아온다고 하여 회갑(回甲) 또는 환갑(還甲)이라고도 부른다.

요즘은 환갑잔치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사람들의 영양 상태와 건강 관리가 개선되면서 일흔이나 여든을 넘기는 사람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얼마 전 보도를 보니 공식적인 노인 연령을 예순다섯에서 일흔으로 높이자는 움직임도 있는 모양이다.


내가 대학원 다닐 때만 해도 회갑을 맞는 교수에게 “회갑기념논문집”을 봉정하는 행사가 자주 열렸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다. 당시에도 그다지 의미 있는 행사가 아니라는 말이 있었다.

백거이가 예순을 맞아 쓴 이 시를 읽어보면 금방 병든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병든 눈(病眼)’, ‘노인 마음(老心)’이라는 시어에서 노환에 지친 나약한 늙은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요즘은 예순을 공공연히 청춘이라고 일컬으므로 어느 누구도 자신을 이렇게 묘사하지는 않을 게다. 나이가 들어도 건강하게 사는 건 좋은 일이다. 불로장생을 추구한 진시황도 50세에 죽었으므로 그가 요즘 사람들이 장수하는 모습을 보면 무슨 불로초를 먹었냐고 캐물으며 제2의 서복(徐福)을 파견할지도 모른다. 아니 자신의 페북을 개설하여 장수의 비결과 영약을 구할까?


문제는 육체적 건강과는 달리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노인도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어릴 때 보았던 환갑 지난 노인들은 대개 지혜롭고 너그러운 품성을 지닌 분들이 많았다. 노인이라는 명칭보다는 ‘어르신’이라는 명칭에 어울리는 언행을 보였다.

예순이 지나면 이미 자식들이 혼인하여 손주를 여럿 두었고, 그에 걸맞은 처신으로 자손들에게 인간 됨됨이를 가르쳤다. 또 대체로 환갑 지난 후에는 집안의 안방을 맏아들에게 내주고 뒷방으로 물러나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조병화의 시 「의자」를 읽으며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 보았던 ‘어르신들’을 떠올렸다.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참 자연스럽고 좋은 시다.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 주듯이”라는 연을 둘러싸고 거의 같은 구절이 세 번 반복되는 것으로 기억한다.

“안티에이징”에 매달리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사는 삶이 소중한 시절이다. “안티에이징”이라고 하면 현대적인 어휘처럼 보이지만 그에 해당하는 전통 용어가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 ‘불로장생’이 그것이다.

현대의학의 발달로 인간은 곧 120세까지 살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미래 세대에게 존경받지 못하고 단지 부담만 주는 노년이라면 오래 살아서 무엇 하랴?


요즘 나의 모습에서도 언뜻언뜻 지혜나 관용은 고사하고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힌 부분을 발견하고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내 마음 자리를 들여다보며 늘 깨어 있으려 노력하지만 참 쉬운 일이 아니다.

내 육십갑자 마지막인 새해에는 멋진 노년을 보낼 계획을 세워보려 한다. 겸허하고 관대하고 지혜롭고 현명하고 유머러스하고 의젓한 실버 말이다.

앗! 이건 성인(聖人)의 모습이 아닌가? 우리 아이들의 말을 들어줄 줄 아는 육십 대로 목표를 소박하게 바꾼다. 생각해보니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노인 되기가 참으로 어려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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