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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이야기

생원보다는 역시 진사

by 신동훈 識 2026.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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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시절인 1792년, 유생 1만여 명이 집단 서명한 이른바 사도세자 복권 만인소萬人疏. 쪽수 채우느라, 정조의 음모로 이루어진 일이다. KBSl 역사스페셜 ‘길이 100m의 상소문, 만인소’ 편 한 장면.

 

조선후기 들어오면 사마시, 소과 입격자들도

서울은 진사가 더 많고, 

향촌에는 생원이 더 많은 현상이 뚜렷해진다. 

따라서 문중별 통계를 보면, 

서울에 살지 않고 향촌에 세거한 종족일수록 생원이 더 많다. 

이는 생원을 선호한 것이 아니라, 부득이한 것으로

진사가 더 쉬웠다면 아마 향촌에서도 진사 입격을 시도했을 것이다. 

진사가 이처럼 생원보다는 더 선호되었기 때문에 

흔히 향촌에서 우리집안은 삼대 진사요, 사대 진사요 이렇게 소개하지 

삼대 생원이요 이렇게 소개하는 경우는 없다. 

향촌에서 몇대 진사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경우 대개 진사와 생원이 뒤섞여 있는 경우가 많은데, 

진사와 생원은 사마시에서 같은 수를 뽑았음에도 향촌 사족의 족보에는 생원이 확실히 더 많다. 

물론 진사건 생원이건 간에 대과 보는 데는 차이가 없으니 어차피 대과 붙었는데

누가 진사 생원을 족보에 쓰겠는가 (물론 예외는 있다. 어떤 족보에는 생원, 진사, 문과까지 다 적는 경우도 있긴 있더라만)

하지만 향촌에서 문과 급제? 쉽지 않았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문과급제는 거의 절반이 서울에서 나온지라. 

생원 진사가 마지막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생원 진사가 마지막이 되면, 

우리 집안은 생원 진사까지만 하라는 선대 유언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나마 호적에는 생원, 진사조차도 쓸 수가 없다. 

문과나 무과 합격자는 출신이라고라도 호적에 적어주는데, 

호적에는 생원, 진사는 직역이 아니므로 유학으로 적던가 아니면 관직 이름을 적어줘야 해서

호적에는 생원, 진사는 나오지 않는다. 

앞서 본 만인소에서는 유학의 바다에 생원, 진사가 가물에 콩 나듯이 섞여 있는 것을 보는데, 

생원, 진사는 족보나 만인소 전용이지

백패를 가져도 호적에서는 적어주지 않으니 아쉬웠을 것이다. 

이걸 어떻게 붙은 시험인데... 

만인소라도 한 번 있으면 생원 진사 이름 앞에 적어두고 

뿌듯해 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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