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지 석탑 출토 봉영奉迎 사리기舍利記 공개는 고대사학계를 일대 후폭풍에 휘말리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이전까지만 해도 무왕의 왕비라고 생각한 선화공주는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선화공주가 가야 할 자리에는 느닷없이 ‘사탁적덕沙乇積德의 따님’이 정좌定座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는 부여夫餘에서 남하한 온조 일파가 세운 왕국인 까닭에 왕족은 ‘부여씨夫餘氏’가 독점했지만 후기로 갈수록, 사탁씨沙乇氏를 필두로 하는 다른 성씨가 권력을 주무르는 시대로 접어드는 양상을 뚜렷이 보인다.
봉영사리기奉迎舍利記에 의하면, 지금의 미륵사는 무왕의 왕후王后가 창건했으며, 그 왕후는 좌평佐平 사탁적덕의 딸이다.
사탁적덕의 사탁沙乇은 요즘의 제갈씨諸葛氏나 남궁씨南宮氏처럼 두 글자를 사용하는 복성復姓이며, 적덕績德은 이름이다.
이런 내용이 공개되자 종래 무왕의 왕비로 알고 있던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는 어떻게 되느냐고 아쉬워하면서 익산 지역사회에서는 소위 일대 멘붕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선화공주를 잃는 대신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탁씨 왕비를 우리는 새로 얻었다.
봉영사리기는 이 왕비 사탁씨가 미륵사를 창건하던 639년(무왕 재위 40년) 무렵 그의 아버지 사탁적덕이 살아 있었는지, 죽었는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좌평 사탁적덕’이라 한 점으로 보아 생존해 있었고, 이 당시 현직이 좌평이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좌평은 모두 16등급으로 나뉜 백제 관직 체계에서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제1급이다. 물론 좌평도 여러 명이었기에 그들 중에서도 특히 서열을 구분해 ‘상좌평上佐平’이나 ‘대좌평大佐平’이 보이기는 하지만, 최고위직이라는 데는 변함이 없다.
각종 기록에 의하면 사탁씨는 백제사회에서 가장 유력한 성씨 집단 중 하나였다. 문헌에는 이런 대성大姓으로 8개가 있다고 해서, 이를 ‘국중 대성 팔족 國中大姓八族’이라 표현한다.
이 8족을 문헌에서는 구체적으로 사씨沙氏·연씨燕氏 · 협씨劦氏 · 해씨解氏·진씨眞氏·국씨國氏 · 목씨木氏·백씨苩氏라고 들었다.
이 중에서 ‘사씨’가 ‘사탁씨’의 줄임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사탁은 문헌이나 금석문에서는 沙宅사택’, 혹은 ‘沙택(口+宅)’과 같이 표기되기도 하지만, 같은 발음에 대한 다른 표기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또 ‘사’는 ‘沙’ 말고도 ‘砂’로 표기되기도 한다.
이런 사탁씨가 문헌에 처음 등장하기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東城王 6년(484) 조에 보이는 내법좌평內法佐平 사약사沙若思다. 내법좌평이란 요즘 말하면 법무장관 정도로 볼 수 있지만 직급은 국무총리급이다.
그 이전 시대에는 어떠했는지 알 수 없지만 사탁씨는 일본서기 흠명천황欽明天皇 4년(543) 조에 ‘사탁(택)기루沙宅己婁’라는 사람이 상좌평上佐平으로 이름을 내밀다가 백제 멸망기에 오면, 더욱 자주 나온다.
백제 멸망 사실을 전하는 일본서기 제명천황齊明天皇 6년(660) 7월 기록에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포로가 된 백제인들을 나열하는 와중에 당시 관료로서 대좌평大佐平 사택천복沙宅千福이 맨 먼저 등장한다. 사택천복은 부여 정림사 5층 석탑에 소정방의 백제 정벌을 기념해 새긴 금석문에도 등장한다.
다른 백제시대 금석문에도 사탁씨는 보이니 가장 저명한 것으로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소위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가 있다. 654년(의자왕 14년) 무렵 제작품으로 추정하는 이 금석문은 화강암 재질이며 현존 높이 109cm에 너비 36cm, 두께 28㎝다.
1948년 부여읍 관북리官北里 도로변에서 발견된 것으로, 원래 비에서 파괴되고 남은 형태이며 양질의 화강암에 가로 세로로 정간井間을 구획해 그 안에 글자를 음각했다.
1행 14자인데 현재 남은 상태는 앞부분에 해당하는 4행까지이며 56자가 확인된다. 우측면 상부에는 음양설에 따라 원안에 봉황문을 음각했고 주칠한 흔적이 있다.
문장은 육조시대 사륙병려체四六騈儷體이며, 자체字體는 웅건한 구양순체歐陽詢體다.
사택지적이란 사람이 늙어감을 탄식해 불교에 귀의해 원찰을 건립했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 사택지적과 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지적智積’이라는 인물이 일본서기 황극천황皇極天皇 원년(백제 의자왕 2년·642) 2월과 7월 조에 각각 보인다.
한데 이들 두 기록에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모순이 있다.
즉, 2월 조에는 흠명천왕의 죽음을 조문하러 백제에서 온 사자의 입을 빌려 “지난해 11월에 대좌평 지적이 졸卒했다”고 한 반면, 이보다 5개월이 더 지난 7월조에는 “백제 사신 대좌평 지적 등이 (천황을) 배알했다”고 하는가 하면, 같은 곳에서 다른 기록을 인용해 “백제사신 대좌평 지적과 그 아들인 달솔達率(이름이 빠졌다-원주)과 은솔恩率인 군선軍善이 왔다”고 했다.
이를 액면 그대로 따른다면 지난해(641년) 11월에 죽었다던 대좌평 (사택)지적이 무덤 속에서 부활해 이듬해 7월에 일본으로 간 조문사절단 단장이 된 셈이다.
이런 모순에 봉착한 역사가들은 대체로 지적이 등장하는 황극천황 두 번의 기록 중 앞선 2월 조 기록에 무엇인가 오류가 있다는 식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번에 미륵사에서 639년에 작성된 사리봉안기가 발견되고, 거기에서 ‘좌평 사탁적덕’이란 왕비의 아버지가 발견됨으로써, 일본서기에서 641년 11월에 죽었다고 말한 ‘대좌평 사택지덕’은 실제로는 ‘사탁적덕’이었을 가능성을 발견한다.
일본으로 간 백제사신이 지난해 죽었다고 알릴 만한 주요한 백제 정치권 인물은 무왕 왕비의 아버지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런 이해에 의하면 일본서기 황극천황皇極天皇 원년(642) 2월과 7월조에 각각 보이는 ‘사택지적’ 중 하나, 틀림없이 2월조의 그것은 ‘사택적덕’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사택지적과 사택적덕은 이름조차 비슷해서 일본서기가 혼동을 일으켰다고 본다.
미륵사에서 존재를 드러낸 무왕의 왕비, 곧 좌평 사탁적덕의 딸이 곧 백제 마지막 의자왕의 어머니인지는 확실치 않다. 만약 그가 바로 의자왕의 어머니라면, 사택적덕은 바로 의자왕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이런 중요한 인물이기에 그의 죽음은 일본 조정에까지 보고됐을 수가 있으며 그랬기에 기록에 남았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642년 7월에 조문사절로 일본에 파견된 사택지적은 바로 사택적덕의 아들일 공산이 아주 크다. 아버지와 아들을 헷갈렸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선화공주를 잃어버렸다고 아쉬워만 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물의 출현을 반겨야 할 까닭이 이에서도 찾을 수 있다. (2017.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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