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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화랑세기가 아니라도 다 알 수 있다는 포석정

by taeshik.kim 2024.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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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정鮑石亭 다르게 보기’는 화랑세기가 몰고 온 중대한 변화 중 하나다. 종래 포석정이라면 딩가딩가 음주가무하는 장소로 알았다. 그것은 삼국사기 신라 경애왕본기 4년(927) 조가 저록한 다음 사건이 발단이었다.
 
가을 9월, 견훤이 고울부에서 우리 군대를 공격하니, 임금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장군에게 명령하여 굳센 병사 1만을 내어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견훤은 구원병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겨울 11월에 서울을 습격하였다. 이때 임금은 왕비, 후궁 및 친척들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를 베풀어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적병이 오는 것을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어찌할 줄을 몰랐다.

임금은 왕비와 함께 후궁으로 도망쳐 들어가고, 친척과 공경대부 및 여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 숨었다. 적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은 귀한 자, 천한 자 할 것 없이 모두 놀라 진땀을 흘리며 엎드려 벌벌 기면서 노비가 되겠다고 빌었으나 화를 면하지 못하였다.

 
‘王與妃嬪宗戚 遊鮑石亭宴娛 不覺賊兵至’. 이에서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유오遊娛’ 중이라 했으니, 이 말을 환락과 등치해서 이해한 것이다.

 

 

한데 느닷없이 출현한 화랑세기에는 포석이 ‘亭’이 아니라 ‘祠’로 등장했다. ‘포석사鮑石祠’라 하거나 그것을 줄여 ‘포사鮑祠’라 한 것이다. 그것은 흥청망청 딩가딩가 잔치하는 단순한 룸 사롱이나 댄스 홀이 아니라 종묘에 비견하는 국가 사당이었다.

그러고 나서 포석정이 출현하는 다른 맥락을 보니, 진짜로 포석정은 사당이었다.
 
포석정은 위 삼국사기 경애왕본기 말고 삼국유사에 두 번 출현하거니와, 이것이 사당임을 명확히 한 것이다.
 
첫째는 신라 제49대 헌강왕憲康王 시대를 시간 배경으로 삼는 권제2권 기이 제2 ‘처용랑 망해사處容郞望海寺이니, 이에 이르기를
 
왕이 또 포석정鮑石亭에 행차하였는데, 남산南山의 신이 왕 앞에 나타나서 춤을 추었다. 주변의 신하들은 보지 못하였고 왕만이 볼 수 있었다.

어떤 사람(신)이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왕도 몸소 그 춤을 추어서 그 춤의 모습을 신하들에게 보여주었다. 신의 이름이 혹은 상심祥審이라고도 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나라 사람들이 이 춤을 전해오는데, 어무상심御舞詳審 혹은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고도 한다.

어떤 사람은, 이미 신이 나와서 춤을 출 때 그 모습을 ‘자세히[審] 본떠서[象]’ 장인에게 명해 똑같이 조각하여 후대에 보여주었기 때문에 ‘상심象審’이라 한다고도 하였다.

혹은 상염무霜髥舞라고도 하니, 이것은 곧 모습에 따라 부른 이름이다.

 
라고 했으니, 헌강왕이 포석정에서 남산을 관장하는 山神을 만났다고 했다.
 
다음으로 권제5 효선孝善 제9가 집록한 ‘빈녀양모貧女養母, 곧 가난한 집 딸이 어머니를 봉양하다는 이야기이니, 그 첫 대목에 이르기를
 
효종랑孝宗郞이 남산의 포석정鮑石亭[혹은 삼화술三花述이라고도 한다.]에서 노닐 때 문객들이 모두 달려 왔는데 오직 두 사람만이 늦게 왔다.

그래서 효종랑이 그 까닭을 묻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孝宗郞遊南山鮑石亭[或云三花述] 門客星馳 有二客獨後 郞問其故]

 
라 했거니와, 이에서 보이는 효종은 신라 제56대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의 아버지로, 김부가 즉위한 직후 신흥대왕神興大王이라 추존되었다. 효종은 화랑이었다.

이런 그가 이끄는 문객門客들을 이끌고 포석정에 간 까닭은 말할 것도 없이 이곳에서 화랑과 관련한 모종의 성서로운 집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화랑세기가 출현한 이후, 더불어 그에서 포석정이 사당으로 등장한 이후 편린으로 남은 포석정은 완전히 새로 보는 대상으로 바뀌었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포석사(포사)는 국가 제사시설일 뿐만 아니라 더욱 범위를 좁히면 화랑과 밀접한 사당으로 드러났다.

이는 신라 하대 화랑 효종랑이 이곳에 그의 무리를 이끌고 간 이유를 설명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적어도 한국 고대사학계에서는 포석정이 댄스홀이 아니라 사당이라는 견해는 대세를 장악했다.

이를 부정하는 놈은 단 한 놈도 없다. 너도나도 사당이라 주장한다.
 
내가 의아한 것은 바로 이 점이다. 화랑세기를 모두가 가짜라 하면서도, 신통방통하게도 포석정만큼은 누구나 가릴 것 없이 사당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경향을 대표하는 저명한 어느 고대사학도에게 내가 물은 적이 있다.
 
“선생은 화랑세기가 가짜라고 그렇게 길길이 날뛰며 반대하면서도 어째 포석정은 사당이라 하시오?”
 
이럴 때마다 화랑세기 위서론자들이 전가의 보물처럼 하는 말이 있으며, 저 친구도 이에서 한 치 어긋남이 없었다.
 
“그건 화랑세기가 아니라도 다 알 수 있는 내용이다.”
 
화랑세기는 포석정에서도 무단 표절이 자행 중이다. 그것도 선혈이 낭자하게 무단 표절이 진행 중이다. 포석정이 사당이라 주장하고 싶거덜랑 화랑세기를 출전으로 밝혀라. (2017.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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