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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섬돌 앞 오동나무는 이미 가을인데...

by taeshik.kim 2018.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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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or 무덤



젊은이는 쉬 늙으나 배움은 이루기 어렵네

한 순간이라도 헛되기 보내지 마라

연못가 봄풀이 꿈도 깨기 전에 

섬돌 앞 오동 이파리는 이미 가을이더라  


少年易老學難成

一寸光陰不可輕

未覺池塘春草夢

階前梧葉已秋聲 


이른바 권학문(勸學問), 배움을 권하는 글이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이 짧은 글은 주희가 한 말이라 해서, 그것을 절대의 기반으로 삼는 시문(詩文) 엔솔로지이자, 불후한 한문 학습 교재인  《고문진보(古文眞寶)》 첫머리에 실려, 대한민국이라는 입시지옥을 지탱하는 권리장전으로 통용한다. 이 말이 그토록 질식할 정도이나, 그 입시지옥을 벗어난 처지에서 보면, 이만큼 절실한 말도 없다. 그래서 저 권학문은 실은  《고문진보(古文眞寶)》는 기억 저편, 아련히 입시지옥, 과거 트라우마에서 벗어난 사람들과 이제는 산 날 보다 살아갈 날이 적다고 간주되는 중년 이후 사람들한테는 거대한 회환과 강박으로 작동하곤 한다. 나 역시, 저 말이 부쩍 심금에 울리곤 한다고 고백한다. 


여담이나 저 말이 주희가 한 말이라 하지만, 그렇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의 문집에 나온다 하나, 문집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저리 훌륭한 말을 주자 선생 아니고는 할 사람이 없다 해서, 속담처럼 군림하던 저 말이 주희로 가탁(假托)한 듯하다. 저 말이 특히 젊은층을 중심으로 심금이 덜한 까닭은 저걸 주입한 이가 주희라는 점에서도 혐의가 크다고 나는 본다. 주희? 좀 갑갑하잖아?  


학문이란 무엇인가? 學問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니, 첫째 가장 일반적이면서 아무래도 이쪽이 맞는 듯한데 學하고 問하라는 뜻이거니와, 배우고 물으라는 뜻이다. 전통시대엔 學하고 問하는 대상은 스승이다. 스승이란 공자와 같은 선현일 수도 있고, 그네들이 남긴 책과 말일 수도 있거니와, 물론 저 말을 되뇌이는 자들이 말한 스승 혹은 책이란 그네들이 어디에 쳐박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으니, 유가들에게 공맹이 남상을 이룰 것이요, 도가들에게는 노장이 그 뿌리를 이룰지며, 불가에서는 부처의 각종 교설이 절대의 성전이다. 다음으로 問을 學한다고 볼 수 있으니, 실은 나는 이 해석을 억지로라도 끌어대고 싶다. 


닥나무 이파리에 앉은 이슬..조만간 서리가 자리를 차지한다.


학문이라 했지만, 동아시아 학문은 언제나 學과 그 일란성쌍둥이로서의 問을 시종일관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거니와, 그리하여 동아시아 학문은 언제나 전통을 '묵수(默守)'하기만 하고, 새로운 창발은 이룩하지 못한다는 곱지 않은 비난에 시종 시달렸으니,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동아시아 한문이 시종해서 전통을 묵수하기만 했느냐 하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가운데서도, 끊임없는 자기혁신이 있어, 유가라 해도, 그 비조 공자를 지나 이미 맹자 단계에 이르러 한 차례 소동을 겪더니, 직후 순자에 와서는 더욱 격렬한 사회변혁운동의 독립선언서로 격상한다. 그러다가 전한 중기 동중서에 이르러, 신비주의 색채와 결합해 천명을 강조하는 사상으로 발전하는가 싶더니, 노장과 불교가 판을 친 위진남북조시대에는 그 짙은 영향권에 포섭되다가, 마침내 당말 한유 이고에 이르러 성리학으로 가는 발판을 마련하고, 주희 시대에는 마침내 천지개벽해, 이 무렵이면, 공맹은 편린밖에 남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 도도한 물줄기에 언제나 공맹은 절대의 성전으로 군림했으니, 저들은 끝까지 공맹을 버릴 수 없었으니, 그래서 이 하나의 사례만으로도 동아시아 학문은 전통을 묵수한다는 비판이 썩 틀린 말은 아니다. 


내가 그래서 이 시대에 맞에 학문이라는 말을 問을 學하다는 말로 비틀어 해석하고자 하는 이유가 바로 이에서 말미암는다? 問이란 무엇인가? 의문이다. 의뭉스러움이다. 혐의다. 부정이다. 모든 새로운 발명은 의심에서 비롯한다. 그 대상은 언제나 전통이며 상식이다. 전통과 상식과 인습이라는 이름으로 통용하는 구습에 대한 전면전을 방불하는 저항과 거부야말로 사람이 새로운 길로 나아가는 관문이다. 


의심하라! 선생을 의심하고 그네들이 남긴 말을 의심하고, 그네들이 휘갈긴 텍스트를 의심하라! 

이 의심에서 새로운 창발은 언제나 싹을 틔우기 마련이다. 


그런 까닭에 학문은 곧 의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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