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계, 특히나 고물(古物) 딱지를 신주보물단지처럼 여기는 우리네 역사 관련 학계에서 고질과도 같은 믿음이 있으니, 오래에 대한 과도한 믿음이 그것이다. 그 고물이 텍스트로 옮겨가면, 덮어놓고 오래된 것일수록 그에 대한 상대적인 믿음이 더 강한 노골과도 같은 신념이 있다. 오래된 것일수록, 그것이 소위 당대(當代)의 증언이라 해서, 그것이 후대에 판본, 혹은 그 사건을 다룬 후대 문헌들에 견주어 당시의 실상을 훨씬 더 잘 전한다는 믿음이 있다.
마왕퇴 한묘 출토 백서본 오성점(五星占)
하지만 놀랍게도 소위 당대 혹은 당대에 가까운 텍스트일수록 의심을 살 만한 구석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언제나 그 보기로 들 듯이, 나는 광개토왕비문이 진실을 말한다고 믿지 아니한다. 그것이 광개토왕 혹은 장수왕 시대 증언이라 해서, 그것이 저 시대 사정을 후대의 다른 것들에 견주어 진실성을 담고 있다고는 전연 생각지 않는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거짓과 과장과 장광설로 점철한다. 이는 우리네 일상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너무나 자주 목도하는 현상이다. 같은 사안 같은 사건을 두고 얼마나 많은 말이 오고가는가? 지금 이 순간 경찰서나 검찰, 혹은 법원에는 내가 맞고 너가 틀리다는 주장이 난무하지 아니하는가?
텍스트 교감 분야로 넘어가서도 마찬가지다. 같은 문헌 같은 기록에 대한 여러 판본이 존재하고, 그것끼리 충돌을 일으킬 적에, 언제나 상대적으로 오래인 판본이 그 본래 저자의 의도를 상대적으로 잘 전달한다는 믿음도 강고하기만 하다. 한데 이에서 우리라 유의할 점은 오래된 텍스트일수록 소리나는대로 적는 경향이 더 강고하다는 사실이다.
제목에서 제시한 저 가차란 간단히 말해 소리만 빌려 적는다는 뜻이다. 뜻은 무시하고, 소리에만 치중한 텍스트 선호 경향이 낳은 음운 현상 일종이다. 중국의 소위 출토문헌을 볼 적에 죽간이나 목간 혹은 비단에 적은 漢代 이전 문헌을 보면 가차가 특히 두드러져, 액면 그대로 해석했다가는 낭패보기 십상이다. 이런 흔적이 현재까지 전해지는 문헌에서도 남았으니, 《장자(莊子)》인가 《노자(老子)》인가 혹은 《순자(荀子)》인지 내가 자신은 없으나, 그에서 빈출하는 '僞'라는 글자를 곧이곧대로 '거짓'이라고 봤다가는 모름지기 원뜻을 곡해할 수밖에 없다. 많은 경우 이 僞는 '爲'에 지나지 않는다. 두 글자가 그때는 발음이 통해서 지 꼴리는 대로, 적는 사람 마음대로 소리만 빌렸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후대에 나온 텍스트가 훨씬 안전성이라는 측면에서 외려 더 믿음을 주는 일이 허다하다. 《손자병법(孫子兵法)》 판본으로 근자 저명한 것이 산동성인가 강소성에서 출토된 소위 은작산 한간(銀雀山漢簡)이란 것이 있다. 이는 현재까지 발굴된 《손자》 관련 텍스트 중에서도 실제의 손자에서 가장 가까운 것이라 해서 보물처럼 취급된다. 우리한테 익숙한 《손자》 텍스트는 실은 삼국시대 조조가 주를 붙인 판본이 거대한 뿌리다. 그 자신 학자요 시인이며 장군이기도 한 조조는 《손자병법》을 중시해, 본인이 직접했는지, 아니면 꼬붕들을 시켜서 그리했는지는 알지 못하나, 직접 그 텍스트를 교감하고, 주석을 붙였다. 이것이 이후 이것이 확고불변한 정전의 지위를 누리거니와, 나중 당대(唐代)에 들어서는 《무경칠서(武經七書)》에 편입되어 그 수위를 차지하기에 이른다.
《손자》는 《태평어람(太平御覽)》과 같은 송대(宋代) 백과사전에서는 갈갈이 찢어져 이곳저곳에 인용되기도 한다. 한데 이들 텍스트마다 문자 혹은 문구의 넘나듦이 발생하거니와, 이런 혼란 혹은 착란은 교감학이 발전하는 결정적인 토대가 된다. 한데 텍스트 변용 양상을 보면, 현재까지 주어진 각종 《손자》 텍스트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전한前漢시대 소위 은작산한간본 《손자》를 보면 곳곳에서 가차 현상을 발견한다. 이후 텍스트에 견주어 무수한 가차가 발견되거니와, 그런 까닭에 이 가차를 인지하지 못하고 텍스트를 해석하면, 오독이 빚어지거나 해독을 할 수가 없다.
《손자》야 지금까지 텍스트가 살아남아, 그 후대 판본들을 기준으로 은작산 한간의 텍스트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지, 그렇지 않고 오래전에 망실해 버린 다른 문헌들의 죽백은 현재의 우리가 얼마나 텍스트를 오독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런 《손자》 역대 판본을 보면, 외려 후대에 나온 텍스트가 훨씬 안전성을 담보한다. 오래된 것일수록 안전하다는 믿음은 버려야 한다.
왜 그런가? 이는 요즘 출판 패턴 경향을 보면 이해가 쉽다. 국내 출판시장 기준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하루 수백종이 쏟아지는 단행본은 100권 중 99권이 초판 1쇄로 생명을 마감한다. 그만큼 책이 안 팔린다는 증좌이기도 하지만, 실은 안 팔리는 책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개중에서 초판 1쇄를 기적으로 넘기는 책이 더러 있으니, 2쇄 이상을 넘기거나, 그 생명이 질겨 독자들한테 무한 사랑을 받아 판을 거듭하기도 하거니와, 이런 같은 책 여러 판본을 비교하면 텍스트 오류는 2쇄 혹은 2판 이후가 가장 안정적이다.
출판업자나 필자한테 오타는 숙명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세심히 주의를 기울여도, 오타 혹은 오류는 쉽게 잡히지 않는데, 그런 오타 혹은 오류가 가장 많이 잡히는 때가 초판 1쇄를 집어든 순간이다. 이는 연극 역시 마찬가지라, 같은 작품을 여러 번 무대에 올리는 연극 공연을 볼 적에 필연적으로 제1회 상연은 우당탕탕 삐걱거림이 많다가, 회를 거듭할수록 안정화 단계에 접어든다.
한국고대사를 볼 적에 이 판본 문제가 심대한 역사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거니와, 백제 혹은 마한과 관련한 소위 ' 대방군(帶方郡) 기리영(崎離營) 전투'와 신분고국(臣濆沽國) 문제가 있거니와, 이 논쟁은 하도 격렬해 내가 추후 별도 코너로 정리하기로 하기로 하고, 지금 이 시점에서는 같은 책을 둘러싼 시대별 판본에서 드러나는 몇 글자의 이동(異同) 여부에 따라 어떠한 참사가 빚어지는지 그 보기를 드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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