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부사진은 보다시피 1976년 7월 12일 월요일판 경향신문 2판 제5면 머릿기사로 실린 김정배 기고 시론이다. 시론이란 간단해 말해 시사 문제와 관련한 논설이다. 지금은 이런 식으로 신문이 지면을 배치하지는 않거니와, 시론 같은 논설류를 모은 면이 아님에도 시론을 각종 시사 문제를 전하는 면 머리기사로 올린 점이 지금과 비교하면 독특하다. 이 기고문이 말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를 폭로하기 위해서는 왜 저 시기에 저 기고문이 배태되었는지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본문 분석이 중요하다.
기고문을 보면 크게 두 부문으로 구성한다. 첫째, 당시 광범위한 도굴 실태에 대한 고발이다. 둘째, 이를 토대로 하는 대응책 주문이다. 논설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 시론은 이 두 가지가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아니한다. 시론으로서는 빵점짜리에 가깝다. 다름 아니라 도굴 실태에 대한 고발이라고 하면, 그 대응책으로서는 그 도굴을 근절하고, 도굴범들을 색출하기 위한 관계당국의 노력 경주를 주문해야 지극히 정상이겠지만, 삼천포로 빠지고 말았으니, 느닷없이 그 대응책으로 김정배가 제시한 방법은 대학에서 발굴하게 하자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뚱딴지도 이런 뚱딴지가 없다.
그렇다면 이 시론은 어찌해서 나왔으며, 과연 저자가 주장하는 저의는 무엇인가? 이를 위해 우리는 시계추를 돌려 40여년 전 그때로 돌아가야 한다. 이 무렵 고고학계 사정을 보면, 박정희 유신정권이 추진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 본궤도에 오르고, 그에 따라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 주도 발굴이 한창 굉음을 내던 시기다. 그 일환으로 경주에서는 천마총에 이어 황남대총 발굴이 대략 마무리되고, 곧이어 안압지와 황룡사지 발굴이 닻을 올렸다.
이 시론 기고 당시 김정배는 고려대 사학과 교수였다. 나중에는 제14대 고려대 총장까지 역임하고, 그 이후에도 고구려연구재단 이사장이며,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이며 문화재위원장이며, 국사편찬위원장이며 하는 각종 중책을 비교적 최근까지 연이어 역임한 사학계 거물이다. 이런 이력을 보면 그는 사학도라기보다는, 뭐랄까 역사학 tycoon 정도로 자리매김해야 할 성 싶다.
각종 그의 이력을 보면 1940년 8월 1일생이니 저 기고문 작성 당시 그는 36살, 전도 유망한 새파란 청년 교수였다. 휘문고와 고려대 사학과 출신인 그는 미국으로 1970년 미국 하와이대학으로 건너가 그곳 대학원에서 인류학 세례를 받는다. 당시 미국 인류학은 이른바 신고고학이라 하는 흐름이 일대 유행한 것으로 기억하거니와, 그는 단순히 문헌사학도로 만족치 아니하고 역사학에 고고학과 인류학을 접목을 시도한다. 귀국해 1975년에는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만 서른살 1970년에는 모교 한국사학과 전임강사로 부임하면서 긴 교수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니 '古文化(고문화)의 原形(원형)을 훼손말자'는 저 칼럼은 그가 한창 교수생활로 재미를 붙일 무렵에 쓴 셈이다. 하기야 그때야 벌써 저때는 학계 중진으로 취급될 무렵이다.
이 칼럼에서 김정배는 도굴이 대표하는 당시 문화재 관리 참상과 관리실태를 고발하면서 시종 분노에 찬 어조로 국가를 질타한다. 그런 그가 일필휘지로 붓끝을 맘껏 휘두르면서 국가까지 질타했으니, 그 기개는 높이 살 만하다. 그렇다면 과연 이 글을 김정배는 왜 썼던가? 다음 구절에 그 저의를 폭로한다.
"지난날의 발굴이 얻은 것 못지 않게 잃은 것이 많았음을 고려해두어야 한다. 學術的 發掘(학술적 발굴)은 대학으로 하여금 조용하게 진행시키고 차분한 연구결과로 보고서가 간행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發掘(발굴)과 盜掘(도굴)이 뒤범벅이 되고 文化財(문화재)는 黃金(황금)의 축재로 전락되며 돈이 있는 者에게는 국내외 인사에게무질서하게 물건이 들어갈 때 이 땅의 문화재는 설 땅을 잃게 된다."
왜 썼는지 그 목적성이 명확하지 않은가? 그는 당시 문화재관리국 주도 국가 발굴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문화재관리국이 주도한 발굴은 곧 그 몫을 담당한 대학 발굴에는 일대 위기였으며, 그것은 곧 대학 발굴의 잠식이었다. 김정배가 저에서 하고자 한 말은 국가가 대학이 해야 하는 발굴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저 칼럼에서 노출한 김정배의 문제의식 혹은 위기의식이 단순히 김정배 개인의 생각을 넘어 당시 대학사회, 특히 고고학을 주된 밥벌이 수단으로 삼은 교수사회의 그것을 고스란히 대변한다는 사실을 안다.
이 이데올로기를 간파해야만 저가 말하는 것들이 어떠한 거짓으로 얼룩졌는지를 비로소 만천하게 폭로하게 된다. 저에서 분명히 보이듯이 김정배와 '김정배들'에 따르면 국가는 대학에 돈만 주고 간섭하지 말고 대학이 자율적으로 발굴하게 하라는 것이며, 말할 것도 없이 그런 예산은 감사도 감시도 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의 주장은 정당한가? 아니, 그 시대에 비추어 봐도 정당했던가?
김정배는 학술발굴은 대학에 맡기고, 대학은 차분히 연구하고 발굴보고서를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리된 적도 없고, 대학이 제대로 발굴보고서를 낸 적도 없다. 저런 주장이 어느 정도는 관철되어 당시 고고학 발굴 현황들을 보면, 비록 소위 큰 건수 발굴은 문화재관리국이 주도했지만, 각 대학 박물관 역시 연합발굴 등의 이름으로 적지 않은 곳에서 발굴에 뛰어들었으니, 경주만 해도 고고학 교수들 전성시대라, 이곳저곳 발굴현장 하나씩은 나눠 먹기했다.
한데 주의할 점은 차분한 연구는 고사하고, 그 발굴 현장 대부분 대학 박물관은 보고서조차 제대로 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저때 발굴한 고고학 성과는 수십년이 지나도록 안낸 보고서가 수두룩하다. 보고서 비용은 도대체 어디서, 누가, 언제, 어떤 방식을 떼먹었는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최근에는 저리 밀린 보고서를 국가가 지원해 내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도 더러 나오는 실정이다. 돈은 지들이 다 빼돌리고, 국민한테 책임을 전가한단 말인가? 보고서 비용은 이제는 퇴임한 저들 발굴 책임자들한테 추심해서 강제로 빼앗아 와야 한다.
김정배는 저에서 발굴이 파괴라는 말을 한다. 이 말, 고고학에서는 여느 개론서엔 다 나오는 말로 기억하거니와, 그렇다면 대학박물관이 차분히 발굴하고 차분히 연구하면 그건 파괴 아닌가? 발굴은 파괴라는 말이 지금도 고고학의 순수성을 말해주는 증좌로 고고학 현장에서는 언제나 금언 혹은 권리장전처럼 통용하나. 퇴출해야 할 괴물이다.
발굴이 무슨 파괴란 말인가? 발굴은 창조다. 해당 유적과 유물에다가 새로운 바람과 생명을 불어넣는 창출이다. 언제까지 발굴은 파괴라는 구닥다리 금언을 되뇌이겠는가?
한데 김정배가 40년 전에 제기한 저 울분, 곧 발굴은 대학이 하게 해달라 하는 읍소 혹은 협박이 40년이 흐른 지금, 고고학계에 다시금 유령처럼 강림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이르기를 첫째, 발굴조사에서 적어도 책임조사원 혹은 정식 조사원이 되려면 대학 관련 석사학위 이상 소지자여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지금은 완전히 퇴출된 대학 박물관의 구제발굴 현장 참여를 許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에 대해서는 별도 마련하고자 한다.
'ESSAYS & MISCELLANI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Curiosity kills historic sites (0) | 2018.09.20 |
---|---|
경관은 만드는 것이지 자연이 주는 선물은 아니다 (1) | 2018.09.17 |
소리중심주의의 소산 가차(假借) or 통가(通假) (1) | 2018.09.16 |
지자체 학예직은 지역토호? (0) | 2018.09.10 |
문화재를 한다는 것과 문화재전문가라는 허상 (0) | 2018.09.0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