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노년의 연구

소작제가 조선사회의 주류가 된 시기

by 신동훈 識 2025. 8. 18.
반응형

필자가 19세기 조선의 상황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목하 진행 중인 조선시대 검안 서류에 대한 의학적 검토 과정에서, 

해당 사망 사건의 배경 설명에 그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는 어려운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검안 서류에 나타난 19세기 말의 상황을 보면

이미 조선의 향촌에는 노비가 거의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물론 마을에서 양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는데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사건에서

어떤 이가 양반이라던가, 평민이라던가 하는 문제는 

사건의 전개와 판결 과정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는 양반이라 해서 경제적 처지가 평민보다 반드시 낫지 않았던 데 이유가 있다고 본다. 

쉽게 말해 필자가 보는 바 19세기 말 상황은 

20세기 초반과 별로 다르지 않은 상태로서 

이미 노비사역에 의해 생산이 이루어지던 18세기 초반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20세기 초반, 망국과 일제시대를 맞기 시작했다 하겠다. 

앞서도 언급한 바 있는 것 같지만 

적어도 호적을 보게 되면 우리나라에서 지주-전호제, 소위 소작제 (병작제)가 사회의 주류가 된것은 

18세기 중후반 이전으로 끌어올리기 어려울 것으로 본다. 

양반이 자기 마을에서 노비를 20-30명씩 데리고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이 다수 목격되는 상황에서

무슨 소작제가 주류가 되겠는가. 

지주와 전호가 소작제를 매개로 계약하는 시기는 

빨라도 18세기 후반, 늦으면 19세기 전반이나 되어야 비로소 사회 주류로 작동하기 시작했을 것이라 본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해방 이후 사회 개혁의 주요한 논점이 되었던 이른바 토지개혁의 문제,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라 농민에게 토지를 배분하는 문제는, 

그 문제의 기원이라 할 소작제는 길어야 150년 정도 조선사회의 주류로 작동한 

매우 일천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음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 소작제 이전은 당연히 노비를 사역하여 양반의 땅을 경작하는 것으로 

이러한 시스템이 무려 18세기 전반까지는 확실히 조선사회의 주류였음이 틀림없다고 필자는 본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