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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 대한 기술에서
조선시대 호적만 봐도 뻔히 알 수 있는 노비사역에 의한 농장의 경영을
고의적으로 은폐하며 그 대신 지주-전호제를 실제로 이 제도가
한국사회에서 보편화한 시기보다 훨씬 끌어올려 기술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호적에서 18세기 전반 호적만 봐도
마을 유력자인 양반들은 한 호 당 20-30명 노비를 거느리며 집단 사역시키는 자가 즐비했다.
따라서 한 마을에 독립 소농은 그 수가 별로 되지 않았다.
이른바 율곡이 이야기하던 16세기 위기론 그리고 경장론의 실체는
바로 이것 때문일 수도 있다.
군역이 부과 안 되는 양반과 이에 예속된 노비 수가 급증하면서
세금과 군역을 부과할 대상이 급격히 줄어든 것이다.
이는 결국 조선의 상태가 개국한지 200년 만에
다시 여말선초 상태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다시 한 번 쓰지만 우리나라는 지주-전호제가 사회의 주류로 성장하는 시기는 매우 늦다.
빨라야 18세기 중후반 늦으면 19세기 전반까지로도 밀린다고 본다.
노비사역이 주류인 사회에서 화폐경제와 자본주의 맹아가 싹틀 수 있겠는가?
어불성설이라고 본다.
이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한국사는 노비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한국사 기술에서 감추고 있는 것이다.
노비사역이 18세기 전반까지도 사회에 주류로 작동하고 있었다면
이른바 자본주의 맹아론은 발 붙일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필자가 하는 이야기는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18세기 전반의 호적을 한 번 보기만 해도 무슨 말인지 금방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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