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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수경원綬慶園, 연세대 신촌캠퍼스를 정좌한 왕릉 정자각丁字閣

by taeshik.kim 2023.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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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원綬慶園 터와 광혜원廣惠院


이 지역 일대는 옛날 수경원이 있던 자리다.

수경원은 조선왕조 제21대 영조의 후궁 영빈이씨映嬪李氏의 원묘였다.

수경원 정자각(왼)과 복원 광혜원



영빈은 1남 6녀를 두었는데, 외아들이 바로 사도세자思悼世子다.

1969년에 수경원이 경기도 고양시의 서오릉 터로 옮기고 봉분이 있던 자리에는 1974년 연세대학교회(루스채플)를 세웠다.

영빈의 원묘를 옮긴 뒤에 3개의 석함에서 두 벌의 지석誌石과 한 벌의 명기明器 및 영조가 어필로 쓴 의열묘義烈墓 현판이 찾아져 현재 우리 대학 박물관 민속실에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수경원 부속건물인 정자각丁字閣과 비각碑閣은 뜰 안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 목조 한옥은 광혜원을 실제 크기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광혜원은 1885년 4월 10일에 개원한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병원이자 연세학원의 연원淵源이 되는 기관으로, 우리 연세인의 의술발전을 꽃피운 산실이 되었다.


복원 광혜원



광혜원은 처음에 재동에 있는 홍영식의 저택을 사용하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원래 건물의 형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자 1985년 5월 연세대학교 창립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복원사업이 추진되어 마침내 1987년 4월 10일에 봉헌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우리나라 현대의학의 발상지를 보존하고 기념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정자각은 연세기록보존소, 광혜원은 연세사료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 뜰 안은 박물관 야외전시장으로서 석조예술의 터전으로 자리잡고 있다.


수경원 석물들인 듯하다.



이렇듯 이곳은 연세의 뿌리를 확인하고 역사를 이어주며 보람찬 미래를 키우는 자랑스러운 연세의 소중한 공간이다.

연세대학교 2003년 10월 30일

 
***
 
이 중에서도 광혜원 문제는 익히 알려졌듯이 연세대 세브란스병원과 서울대병원 사이에서 연원을 둘러싼 논란 핵심이 되는 사안이라,

이 문제 복잡다기한 구석이 있음을 확인하는 한편, 이 논란은 양쪽 모두 비판받아야 하는 구석이 적지 않다는 점을 예서는 지적한다. 


따라서 나는 연세대백주년기념관 뒤뜰, 그러니깐 연세대박물관 경내에 연세대가 세운 저 설명을 토씨 하나 고치지 아니하고 전재한다. 


수경원 석물들인가?


영빈이씨映嬪李氏는 비록 후궁이나, 엄연히 세자의 생모였으며, 나아가 그 생물학적 손자는 왕위를 이은 정조라, 다른 후궁과는 현격이 다른 대접을 받는다. 

영조 40년, 1764년 7월 26일, 향년 68세로 경희궁 양덕당에서 사망하자 영조는 직접 묘지명을 지어 애도한다. 이 묘지명은 청화백자에 새기는데, 글씨는 화평옹주 남편으로 영조 사위이면서 연암 박지원한테는 팔촌형님이 되는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1725~1790)이 글씨를 썼다. 



통일신라라 했는데 시기는 고려초 정도로 떨어지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39년간 해로하다 지금은 꿈 같이 되고 말았으니 내 슬픔이 너무나 깊다. 다섯 달만 더 살았더라면 칠순이 되었을 것을,
참으로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 사람의 일이다.” 

그의 시신은 오늘날 이곳에 묻히고 그 무덤은 의열묘義烈墓라 하다가 정도 12년, 1788년 정조가 생할머니라 가만 둘 수 없다 해서 선희궁宣禧宮이라 높이고, 이어 고종시대에는 사도세자를 장조莊祖라 해서 임금으로 추존하니 그 생모라 해서 무덤 역시 수경원綏慶園이라는 이름으로 격상하기에 이른다. 그의 사당 역시 나중에는 칠궁七宮 중 하나로 들어간다. 

영조는 정식 부인이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1693~1757)지만, 서씨가 불임 여성이었던 듯, 이에서는 전연 자식을 두지 못하니, 그렇다고 마누라를 바까버릴 수도 없고는 해서 계속 데불꼬 사는 대신, 후궁들을 들여 후사를 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린다. 


수경원 정자각


영빈 이씨 역시 그렇게 해서 간택된 후궁이어니와, 그래서 아들까지 두어 훗날 영화를 보는 듯하지만, 까딱하면 죽쑤어 개줄 뻔했으니, 영조랑 사이에서 딸만 줄줄이 낳아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가 그들이며, 나머지 둘은 이내 갔다. 막판에 건진 것이 바로 사도였다. 

하지만, 그 자신 지극히 불행하기 짝이 없어, 망나니에 정신병까지 겹친 사도가 각종 비행을 저지르고 걸핏하면 사람을 죽이는 일이 벌어지자, 참다 못한 영빈은 자기 아들 비행을 영조한테 직접 고변해 우리가 아는 그 유명한 뒤주사건으로 사도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기에 이른다. 



수경원 정자각



혹자는 이런 고변을 그의 소행이라는 데 지나친 의미를 두기는 하나, 그건 새삼스런 일이 아니었으며, 사도의 뒤주비극은 시간문제였을 뿐이다. 당쟁으로 희생됐니 하는 헛소리 난무하나, 광란이었을 뿐이다. 

어쩌다 이야기가 이렇게 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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