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방위체제의 확립과 경도京都 - 사도四都체제
한양을 비롯하여 전국을 오위五衛로 구분하여 방어하던 군사체제는 임진왜란으로 한순간에 무너졌습니다.
급기야 왜란 중에 영의정인 유성룡의 건의로 수도경비를 위한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지방에는 속오군을 두어 국난 극복을 도모하였습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는 안주 등 국경의 주요 산성에 배치된 조선군을 우회하여 직접 한양에 침략하였고, 그 결과 인조는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해야만 했습니다.
그 이후 조정에서는 국방에서 국경방어보다는 수도방위가 더욱 중요하다는 자각 하에 수도방위체제의 확립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인조 때에는 친위군 및 경기도 방위 군대를 각각 어영청과 총융청으로 재편하고 수어청을 설치하였습니다.
숙종 때에는 금위영을 설치하면서 기존의 훈련도감과 함께 오군영 체제가 확립되었습니다.
영조 때에는 훈련도감 등 삼군문에 도성민들을 편제하여 수도의 방위체제를 정립하였습니다.
정조 때에는 광주, 수원에 군사행정 도시인 유수부를 설치하여 기존의 개성, 강화와 함께 4유수부를 갖추었습니다.
그리하여 수도 한양을 중심으로 내·외곽의 방위체제가 정비되었습니다.
18세기말 4개 유수부는 사도四都로 불렸습니다.
이로써 조선은 경도와 더불어 4개의 별도別都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경도-사도의 영역은 오늘날 수도권의 범위와 일치합니다.
Establishment of the Capital Defense System - Capital City and the Four Cities
The military system that was structured to defend the whole country by dividing them into Owi (Five Commands), promptly collapsed with the Japanese invasion in 1592. Realizing that a capital defense system was far more important than border defense, Joseon installed the Eoyeongcheong (Royal Guards Command), the Chongyungcheong (Command of Northern Approaches), the Sueocheong (Command of the Southern Approaches), the Geumwiyeong (Capital Garrison), and the Hullyeon Dogam(Military Training Command) to defend the capital.
During King Jeongjo’s reign, Yusubu (special magistracies) dedicated to military administration and protecting the capital, were installed in Gwangju and Suwon, which completed the Four Yusubu system along with the existing Yusubu in Gaeseong and Ganghwa.
Hence, the defense system to protect the capital, centered around Hanyang with the four cities as the outside strongholds, was reorganized.
By the late eighteenth century, the four Yusubu were collectively called the Four Cities (Sado).
The area occupied by the capital and the Four Cities corresponds to the modern-day Seoul Capital Area.
王都防御体系的建立与京都--四都体系
包括汉阳在内,将全国分为五卫建立的军事防御体系在壬辰倭乱时不堪一击,瞬间崩塌。朝廷在倭乱重创之下急于克服国难,这才听取领议政柳成龙的王都防御建议,设置“训炼都监”,在地方成立束伍军。丙子胡乱爆发时,清军绕开布置于国境主要山城的朝鲜军队,直接入侵汉阳,仁祖抵抗不及,只得降服于清太宗。这之后,朝廷意识到相比于国境防御,国防重心更应当倾向于王都防御,为此开始着手建立王都防御体系。仁祖时期,将亲卫军和京畿道防御部队分别编入御营厅和总戎厅,设置守御厅。肃宗时期设置禁卫营,与已有的训炼都监形成五军营体系。到了英祖时期,进一步把都城百姓编入训炼都监等三军门中,正式确立了王都防御体系。正祖时期,在广州、水原设置军事行政区留守府,与已有的开城、江华一起形成了四个留守府。到此为止,以王都汉阳为中心的内外围防御体系整备完毕。十八世纪末,四个留守府被称为“四都”,朝鲜由此形成了“京都-四别都”体系,京都-四都的领域与今日首都圈的范围一致。
首都防衛体制の確立とキョンド(京都)-四都体制
ハニャン(漢陽)をはじめとする全国を「五衛」に分けて防御さしていた軍事システムは、文禄・慶長の役により一瞬にして崩壊してしまいました。戦乱の中、領議政のユ・ソンリョン(柳成龍)の建議により首都防衛のための「訓練都鑑」を、地方には「束伍軍」を設置し、国難を克服しようと努めました。丙子胡乱の時、清は国境の主要な山城に配置された朝鮮軍を迂回して直接ハニャン(漢陽)を侵略し、その結果、インジョ(仁祖)は清の太宗に降伏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その後、朝廷では、国境を守るより首都防衛の方がより重要だということを認識し、首都防衛体制の確立に乗り出すことになります。インジョ(仁祖)のときは、親衛軍やキョンギド(京畿道)防衛軍をそれぞれオヨンチョン(御営庁)とチョンユンチョン(摠戎庁)に再編し、スオチョン(守禦庁)を設置しました。スクチョン(粛宗)のときは、クミヨン(禁衛営)を設置し、従来の訓練都鑑とともに、五軍営体制が確立されました。ヨンジョ(英祖)のときには、訓練都鑑など三軍門に都城民を編制し、首都の防衛体制を確立しました。チョンジョ(正祖)のときはクァンジュ(広州)とスウォン(水原)に軍政都市のユスブ(留守府)を設け、既存のケソン(開城)、カンファ(江華)、スウォン(水原)とともに、4ユスブ(留守府)を築くようになりました。このようにして首都ハニャン(漢陽)を中心に、内・外郭の防衛体制が整備されました。18世紀末期、4つのユスブ(留守府)は「四都」とも呼ばれました。これにより、朝鮮は京都に加え、4つの独立した別都を擁するようになります。キョンド(京都)-四都の領域は、今日の首都圏の範囲に重なり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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