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훈과 함께하는 paleopathology

[스핀오프] 아웃브레이크: 조선을 공포로 몰아 넣은 전염병 (1)

by 응도당 2020. 2. 23.

신동훈 (서울의대 생물인류학 및 고병리학 연구실)


필자 주) 갑자기 일이 겹쳐서 제때 잉카 미라에 대한 글을 올리지 못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코로나 바이러스때문에 온 세상이 난리인지라 어차피 잉카 미라에 대한 이전 연재의 내용도 기억들 못하실것 같아 시류에 맞게 짧은 스핀오프를 하나 쓰고 다시 원래 연재로 돌아가고자 한다. 


-----------------------------------------------------


세상이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난리이다. 이에 대해서 할말은 많지만 어차피 정보의 홍수시대. 여기서는 잠시 수백년 전으로 돌아가 조선시대 전염병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 해보겠다. 


조선시대, 하면 열악한 위생상태, 저열한 영양상태 등으로 한번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면 속절없이 무기력하게 당했을 것 같지만 조선시대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조선시대도 사람이 살던 시대이고 살기 위해 필사적인 몸부림을 쳤고, 


또 당시의 조선 정부도 그 효율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지만 나름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마지막까지 전염병을 통제하고자 한 흔적이 보인다. 


우리나라 전통시대의 전염병 기록을 찾아 보면 삼국~고려시대에도 관련 기록이 드물지 않게 보이지만 전염병 발생과 발전, 그리고 그 소멸 과정을 생생히 엿볼 수 있는 것은 단연 조선시대다. 이 시대에는 실록과 승정원일기라는-. 인류 역사상 대단한 기록물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이 기록 속에 당시 사람들의 몸부림이 생생히 담겨 있다. 


조선시대 전염병은 거의 매년 발생하다시피 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 중에서도 역사적으로 엄청난 후과를 낳은 대규모 전염병 유행이 두 번 있었다. 


첫째는 중종 19~20년의 역병. 서기 1524년에서 1525년 연간에 해당한다. 

두번째는 순조 21~22년의 역병의 대유행. 서기 1821~1822년의 일이다. 


이 두 번의 역병은 조선왕조 근간을 뒤흔들 정도로 엄청나게 큰 충격파를 던졌으며 그 결과는 한국사의 이후 진로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중종 연간의 역병은 길게는 임진왜란 때까지도 조선에 지속적인 악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며, 

순조 연간의 역병은 조선후기 사회의 붕괴에 결정적 타격을 날렸다고 보는 이가 많을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 두 역병은 서로 다른 원인에 의해 발생했다고 보이지만 유심히 들여다 보면 유사한 부분도 꽤 많이 보인다. 


그런 유사점 중 첫번째 부분은 전염병의 시작이 두 사례 모두 평안도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압록강 하류. 조선시대에는 이 강을 건너 중국에서 역병이 전파되어 들어왔다. 


중종 19~20년의 역병은 1524년 7월 7일. 평안도에서 중앙으로 날아온 장계에 의해 시작되었다. 아래 번역문은 모두 국사편찬위원회의 실록 번역문에 의한다. 


"용천(龍川) 경내에 여역(癘疫) 이 매우 치열하여 죽은 사람이 670명이나 된다. 예전부터 역기(疫氣)가 전염하여 사람이 많이 죽으나, 어찌 이처럼 참혹한 일이 있는가? 곧 감사(監司)에게 하서(下書)하여, 여러 가지로 구원하여 다시 죽는 사람이 없게 하고, 사람이 죽은 집에는 산 사람이 있더라도 굶주릴 걱정이 없지 않으니 진제(賑濟)하고 구휼(救恤)하도록 아울러 이르라, 용천 군수(龍川郡守) 김의형(金義亨)은 그 백성이 많이 죽었으면 곧 감사에게 치보(馳報)해야 할 것인데 감사가 탐문한 뒤에야 바로소 그 죽은 수를 신보(申報)하였으니, 부지런히 돌보는 뜻이 아주 없다. 추고(推考)시킬 것도 감사에게 아울러 이르라."


용천이 어디인고 하니.. 바로 아래와 같다. 


평안북도 북쪽 끝을 그린 대동여지도. 이 지도에서 보이는 파란색 물줄기가 압록강이다. 화면 가장 오른쪽에 보이는 용천은 압록강 건너 들어오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도시이다. 1524년 이 고을에서 670명이나 되는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대역병은 시작되었다. 


용천에 처음으로 발생한 것을 보면 아마도 이 전염병은 중국에서 넘어온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전염병이 조선으로 넘어오기 전 중국에서 유사한 역병이 유행한 흔적이 있는가를 찾기 위해 명청실록을 찾아보았지만 뚜렷한 이야기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더 자세한 중국측 기록에는 나와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다. 


만약 중국에서 유행하던 전염병이 넘어온 것이라면 어떤 방식으로 전파되어 왔을까? 알다시피 조선시대에 중국과 조선의 국경은 쉽게 오갈 수 있는 경계선이 아니었다. 이 시대의 월경은 죽음으로 다스려졌지만, 사냥꾼 등 이를 무시하고 양쪽을 오가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라고 하니 (기호철 선생 전언) 그렇게 국경을 넘나드는 사람들을 통해 조선쪽으로 전염병이 넘어온 것은 아닐까 막연히 짐작할 뿐이다. 


7월 7일 용천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조선 조정은 다음날인 7월 8일에도 이 문제를 다시 논의에 올렸다. 


"어제 평안도의 계본(啓本)을 보건대, 여역(癘疫)으로 죽은 용천군(龍川郡) 사람이 600여 인이고 의주(義州)·철산(鐵山) 등의 고을에도 이 병이 있다 하니, 내가 매우 놀랐다. 서방 백성은 여연(閭延)·무창(茂昌)에서 야인(野人)을 쫓을 때에 죽은 사람이 워낙 많은데 이제 다시 이러하므로 변방의 일이 더욱 염려스러운데, 어떻게 처치해야 할런지 모르겠다."


하매, 영사(領事) 남곤(南袞)이 아뢰기를,


"남방은 풍기(風氣)가 더우므로 이 병이 있으나, 서북방은 토지가 높고 추워서 이 병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이제는 역시 이러하니, 더욱 놀랍습니다. 다만 이 병을 얻은 사람은 며칠 만에 죽는데, 무릇 백성은 우혹(愚惑)하여 의약(醫藥)을 모르고 귀신만 섬기므로 구완할 방도를 몰라서 이렇게까지 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 고을에서 죽은 사람이 그렇게 많으면 남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국가에서 백성을 옮겨 변방을 채우더라도 어찌 풍성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용천은 의주 다음에 있어 나라의 문호(門戶)가 되는데, 그 조잔(凋殘)이 이러하니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조선 조정에서 심각하게 생각한 부분은 이것이었다. 물론 전염병으로 많은 백성이 죽는 것도 문제이지만 가장 걱정스러운 부분은 이 지역 고을이 타격을 받으면 압록강 저편의 여진족이 남하하여 들어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16세기 내내 압록강과 두만강 피안의 여진족과 군사적인 충돌을 자주 경험한 조선으로는 당연히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보기엔 조선시대에 이처럼 대단한 전염병이 돌면 정부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을 것 같지만 사실 실록 등 당시 기록을 읽어보면 그렇지는 않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그런 것처럼 당시 정부 역시 전염병이 발생하면 즉각 보고 받았고 이를 통제하기 위해 결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이로부터 5일 후인 7월 13일, 조정은 용천 지역 전염병 구료를 위해 아래와 같이 결정을 내린다. 


"용천(龍川)에 여역(癘疫)이 크게 일어 죽은 사람이 많고 이제 그 병이 철산(鐵山)·의주(義州) 등지에 만연한 데다가, 더구나 이 도(道)는 여연(閭延)의 야인(野人)을 쫓은 뒤로 매우 잔폐(殘弊)한데, 이제 점마(點馬)를 보내면 말몰잇군과 지공(支供) 등의 일로 폐해가 백성에게 미칠 것이니, 보내지 마소서. 또 이 도의 병은 몇 고을에서 그 형세가 그치지 않을 뿐더러 이웃 고을에 전염되므로 매우 염려스러우니, 밝은 의원(醫員) 몇 사람을 가려 보내어 약을 가져가서 구완하게 하소서."


그리고 1주일 후인 7월 20일에는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린다. 


"평안도는 여역癘疫으로 백성이 많이 죽었으니, 변방邊方을 채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억지로 들어가 살게 하는 것은 애매할 듯하나, 죄를 지은 사람을 먼저 들여보내면 백성에게 원망이 없고서 변방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병조에 말하라."


여역 때문에 사람이 많이 죽어 고을이 절단났으므로 여진족 침입이 우려되는 것이다. 따라서 즉각 변방을 채우라는 조치를 내린다. 들어가 살 사람이 없으므로 우선 죄인을 먼저 보내라는것이다. 실제로 평안도 함경도 지역에서 호구가 잔폐해지면 이런 식으로 하삼도 사람들을 북쪽 군현으로 올려보냈다. 


이순신 장군의 녹둔도 전투를 그린 수책거적도. 16세기 조선은 여진족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던 중이었다.


7월 24일 되면 보다 자세한 상황이 평안도관찰사로부터 올라왔다. 


"지난 3월 이후로 여역癘疫 때문에 죽은 의주義州 백성은 687명이고, 철산鐵山의 죽은 백성은 169명이며, 용천龍川의 죽은 백성은 전일 계본啓本 이후로 죽은 자가 39명이고, 곽산郭山은 정월 이후로 죽은 자가 47명입니다. 의주·철산은 죽은 백성이 이처럼 많은데도 행이行移하여 물은 뒤에야 첩보牒報하였으므로, 지금 추고합니다."


용천에 600명이 죽었다고 했는데 그 후에도 39명이나 더 죽었다고 한다. 문제는 죽은 사람이 용천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의주와 철산. 특히 의주에서도 700명 가까이 죽었는데 수령이 이를 즉각 보고하지 않아 제때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처음 보고가 있은지 2주를 넘어서는 중앙에서도 당시 평안도 상황을 대략 파악하게 된 것이다. 


7월 25일에는 다시 한번 평안도 지역에 사람이 많이 죽어 이를 다시 보충할 방법을 논의한다. 


"평안도는 본디 인물이 적은 데다가 여역癘疫으로 무려 1,800여 인이 죽었으니, 어찌 이런 재변이 있습니까? 변방을 채우는 일은 반드시 백성을 옮겨 억지로 들어가 살게 해야 하는데, 이것은 또한 어쩔 수 없이 해야 하겠으나, 남방 사람들이 늘 이 일이 있을까 염려하고, 뽑힌 자는 혹 목매어 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국가를 위한 큰 일이라면 백성의 작은 폐해를 돌볼 수 없습니다. 이제 평안도의 여역으로 빈 땅과 사군四郡의 빈 땅에 백성을 옮기는 일은, 억지로 들어가 살게 하지 않더라도 하삼도下三道의 감사監司를 시켜 죄를 지은 자를 뽑아서 들여보내게 하면, 스스로 지은 죄이므로 억지로 들어가 살게 하는 자처럼 깊은 원망을 사지 않고도 변방을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서도 변방을 채우지 못하면 억지로 시켜도 될 것입니다. 대저 임금의 형벌은 가볍게 할 수도 있고 무겁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니, 변방을 채울 때에는 죄가 가벼운 자라도 중률重律을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선 조정의 방침은 사망자 파악과 여역이 돌고 있는 지역 파악 -- 약을 내려 보냄 -- 사망자를 충원하기 위한 이주자 물색이라는 단계를 밟아 처리되고 있었는데 역시 가장 큰 이유는 여진족의 남하라는 문제가 컸던 셈이다. (계속) 

댓글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