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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스핀오프] 아웃브레이크: 조선을 공포로 몰아 넣은 전염병 (2)

by 초야잠필 2020.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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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 (서울의대 생물인류학 및 고병리학연구실)


앞에서 전염병이 처음 발생한 용천龍川 지역이 압록강 가까이에 바싹 붙어 위치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용천과 의주 등 압록강 연변에 위치한 지역에서 처음 발생했으므로 중종 19~20년 (1524~1525)의 역병은 아마도 압록강 대안에서 전해졌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하지만 압록강대안이 같은 전염병에 휩싸여 있었는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그러면 여기서 중종 년간의 압록강 대안의 상황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한번 살펴보자. 

조선은 국초부터 북쪽 국경지대의 야인(여진족)을 구축하고 이 지역을 한국사 판도에 포함시키기 위한 노력을 중단없이 진행했다. 흔히 세종대 북방 개척과 세조로 이어지는 개국 초 북방정벌 결과가 4군6진이라고 인식하지만. 실제로 조선사를 읽어보면 북방에 대한 조정의 관심은 꺼진 적이 없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전기 남만주 일대에는 소위 건주여진이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명대 건주여진의 발전. 압록강에서 두만강까지 넓은 지역에 퍼져 살고 있었으며 조선과 명의 기미를 받고 있었다. 중국쪽에서 나온 역사지도를 보면 명대에 이미 만주일대는 중국세력의 판도하에 들어와 있었을 것 같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중국사에서 이야기 하는 명대의 행정구역. 요동일대에는 요동도사가, 만주일대에는 누르칸도사라는 군정 행정구역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당시 상황을 좀 더 디테일하게 들여다보면 명의 세력은 만주일대를 기미하고 있는 수준이었을 뿐 이 지역을 완전히 통제-지배하고 있었던 것과는 거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먼저 명이 건국한 후 북원 세력을 밀어내면서 요동 지역을 차지하게 되지만 여기는 다른 중국 내 지역과 달리 군현으로 편제되어 통제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소위 말하는 군정기관-.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 약칭 요동도사遼東都司라는 기관을 두어 다스렸다고 하는데 그 실상은 위 지도에 보는 바와 같다. 어쩌면 당나라 시대 절도사와 비슷하다고도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요동 지역만 해도 명나라가 망할 때까지 이 지역은 이러한 군정 기관이 다스리고 있을 뿐 제대로 된 행정구역으로 통제하지는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군정기관 책임자 중 하나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로 우리가 잘 아는 이여송의 아버지 이성량李成梁(1526~1615)이다. 


강원대 남의현 교수 주장에 따르면 명나라 때 실제로 명의 통제가 강하게 미치던 지역은 바로 이 요동도사가 다스리던 지역까지이며, 그 이동 쪽은 명이 거의 통제를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위 지도를 보면 누르칸도사奴兒干都指揮使司라고 되어 있는 부분이 있는데 이곳은 요동도사처럼 군정기관으로서 만주일대에 설치된 곳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나라 삼국시대 안동도호부처럼 제 역할을 못하다가 30년도 못되어 폐지되었다고 한다 (1409-1435). 


따라서 15세기 중엽 이후에는 사실상 만주는 명나라로 봐서는 방기되어 현지에 설립된 토착민 정부인 건주위 통제하에 간접지배하는 형식에 그쳤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초에 조선이 북방개척을 할 때 만나는 것이 왜 명나라가 아니라 여진인가 하는 점이 이해가 간다. 조선은 명이 거의 통제하지 못하던 지역의 여진족을 구축하면서 북쪽으로 진출해 올라간 것이다. 


특히 위 첫번째 지도를 보면 압록강 하류-. 의주 부근의 앞서 이야기 한 요동도사와 조선이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되어 있는데, 이것도 실상을 살펴보면 명과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고 한다. 


예전에 이 블로그 쥔장께서도 이야기 했듯이 이 시대의 국경이란 선이라기 보다는 면에 보다 가까운것으로서-. 


조선이 자국 국경을 나와 명나라 국경을 들어갈 때까지 사실상 공지가 꽤 넓게 존재했다는 것이다. 남의현 교수 글을 보면 대략 압록강에서 명나라 책문이 있는 지역까지 문자 그대로 빈 땅이 있어 조선에서 사신이 갈때 압록강을 건너면 명의 책문까지 누구의 땅도 아닌 곳을 상당히 멀리 지나가야 했다는 것이다. 


해동지도에서 보이는 압록강에서 책문까지의 빈땅. 그림 왼쪽에 위화도가 보인다. 봉황성에 설치된 책문인데 조선전기에는 보다 압록강에서 먼 지역에 책문이 설치되어 조선과 명나라 사이 공지는 훨씬 넓었다고 한다. 그 빈땅에 여진족이 숨어들었다.


이 빈땅은 실제 상 중국과 조선의 접촉을 최소화하기 위해 양국 사이에 인위적으로 설정된 공지나 다름없었는데-. 


세월이 흘러가면서 단순한 빈땅이 아니라 압록강 중상류에 살던 여진족이 흘러들어와 살곤 하는 땅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사실 조선시대 전기가 되면 여진족은 이미 더 이상 수렵채집 부족이 아니라 농업을 기반으로 고도의 생산성을 누리기 시작한 농경문화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는데 이들은 기름진 땅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였고 그 모습이 바로 조선전기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북방 여진족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조선은 압록강 너머 공지에서 활동하는 여진족을 통제하기 위해 때로는 압록강 너머까지 진출하여 군사적 작전을 해야 할 때가 있었고-. 


때로는 압록강을 몰래 넘어가 그곳에서 경제활동을 하던 조선 사람들까지 있어 압록강 대안의 지리적 정보가 명나라보다 훨씬 풍부하게 확보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최종적인 결과가 바로 조선시대 북방 지도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 시대 지도를 보면 압록강 북쪽 지명까지도 매우 상세하게 나와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바로 이런 역사적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해동지도에 나와있는 압록강 하류. 압록강에서 책문까지는 빈 공터로 여진족들이 많이 흘러들어와 살았는데 실제로 이 공터는 조선전기에는 지도 위에 보이는 연산관까지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명나라 중기에 책문을 더 남쪽으로 옮겨 설치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조선과 명 양국 국경사이에는 공터가 있었다고. 남의현 교수 논문 "고지도를 통해서 본 15~17세기의 변경지대 압록강, 두만강 변을 중심으로"에서 전재함. 


압록강 대안 지역이 흔한 역사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명나라와 국경을 바로 맞댄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존재한 여진족이 더 많이 살고 있는 상황이었다면 중종 연간의 용천 지역 전염병은 어쩌면 여진족 사이에서 돌고 있었던 전염병이었을지도 모른다. 


1524~1525년 연간 중국쪽 기록에서 대규모 유행병 존재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는 이상, 우리쪽으로 넘어온 당시 전염병은 (1) 중국쪽에서 넘어온 전염병이지만 우리가 아직 못찾고 있거나 (2) 아니면 중국쪽에서 당시 쉽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만주지역 여진족 농경민 사이에서 돌던 유행병이 우리에게 넘어온 것이거나. 그 어느 쪽이건 둘중의 하나이겠지만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계속) 



[스핀오프] 아웃브레이크: 조선을 공포로 몰아 넣은 전염병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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