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스핀오프] 아웃브레이크: 조선을 공포로 몰아 넣은 전염병 (3)

by 초야잠필 2020. 3. 1.
반응형

신동훈 (서울의대 생물인류학 및 고병리학연구실)


*이번 회 연재는 중앙사론 39에 실린 이경록 "조선중종 19-20년의 전염병 창궐과 그 대응" 논문에 의한다. 


그렇다면 1524년 (중종 19년), 압록강을 넘어 들어온 전염병은 어떻게 번져갔던가. 


7월 17일 처음 조선 조정에 보고된 전염병은 8월까지는 평안도 서부지역에 퍼져나가다가 동년 9월-1525년 1월까지는 평안도 내륙지역으로 퍼져나갔으며 1525년 2월 부터 10월 사이에는 평안도 전역이 이 전염병으로 쑥대밭이 되었다. 


이 전염병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까. 


이경록은 이 전염병은 심각한 발열을 주된 감염 증상으로 한다는데 늘상 전염병에 시달리던 조선사람들이 볼 때도 흔히 보기 어려운 생소한 양상의 전염병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아마도 발열 이외의 증상이 또 더 있었겠지만 역사문헌상으로는 구체적으로 어떤 양상으로 질병이 진행되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사실 조선시대 전염병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바로 이것인데 역사문헌에 기록된 내용이 소략하여 의학적 진단을 내리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발열, 두통 등 다른 전염병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증상만 문헌에 남아 있을 뿐이므로 어떤 특정 질병인지 모호하다는 것이다. 


최근까지 대부분의 의사학자가 1524년 전염병은 티푸스성 질환이라고 보았다. 일견해서 티푸스성 질환은 이 전염병의 발병양상과 비슷해 보여 타당한 견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올해 중국과 한국에서 크게 번지는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을 보면 과연 조선시대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법정 감염병만 유행하고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압록강을 넘어 들어오는 전염병의 실체는 21세기 중국에서 들어오는 감염병을 보자면 한층 모호해졌다고 할 수 있겠다. 


중종 19년 (1524) 1월-8월 사이에 확인된 발생지역. 이경록의 위 논문에서 전재. 


아무튼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처음 용천에서 보고가 들어온 전염병은 이어 8월 7일 보고에서는 위 그림에서 보듯 대략 고려시대 강동6주 그 언저리쯤 해당하는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아마도 당시 전염병은 지역간에 연결되어 있는 도로를 따라 퍼져나갔을 것이므로 고려시대 강동6주로 편입된 이후에도 이 지역 고을들이 얼마나 서로 밀접하게 지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고려시대 강동6주. 중종 19년 1-8월 사이의 전염병 확산 지역과 거의 비슷하다는 거을 알 수 있다. 처음 전염병은 이전 강동6주에 해당 하는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고려시대 거란의 침입로나 고려의 방어선 구축을 위해 짜인 교통로가 조선 중종대에는 전염병의 확산 통로가 되었을 것이다. 


삭주와 구성 지역의 대동여지도. 압록강 연안 마을들이 교통로로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 이 통로는 평화시에는 교역로, 여진과 전시에는 군진간의 교통로가 되었겠지만 전염병 창궐 기간에는 그 확산로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8월까지의 사망자 숫자는 조선 조정에 보고된 것만 1,831명에 달했다. 

앞에서 조선왕조는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완전히 무기력하게 손을 놓지는 않고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오히려 당시 조선 조정은 가능한 모든 방법을 총 동원해서 전염병을 통제하고자 했는데 역사 문헌을 읽어보면 그 대응 방법이 거의 정형화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쉽게 말해서 나름의 매뉴얼대로 전염병 방어가 진행되었다는 것인데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의관파견. 전염병이 확인되면 조정은 중앙의 의관에게 약재를 들려 현지로 내려 보낸다. 한의학에서 전염병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알려진 약제가 주로 보내졌다고 한다. 제도 상으로는 관청에 신고만 하면 누구든 치료받고 약을 얻을 수 있다고 되어 있는데 과연 지금 북한의 의료제도처럼 어느 정도로 규정상 이야기가 제대로 지켜졌을지는 의문이다. 


드라마 허준을 보면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의관이 현지로 내려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사서에 실제로 나오는 장면이다. 


둘째는 빠른 매장이다. 조선시대 기록에서 전염병 발생이 일어난 지역에서 묻어주는 사람 없이 묻힌 시신을 빨리 수습하여 매장하도록 하는 명령은 자주 보인다. 


세번째는 구급방의 보급이다. 우리가 아는 "간이벽온방" 등의 책은 모두 이 시기 전염병 구호를 위해 다급한 조정이 한의학에서 이 질환치료를 위해 유효하다고 알려진 것들을 뽑아 출판하여 현지에 내려보낸 것이다. 읽는 사람의 편의를 위하여 한글과 한문 두가지로 쓰여 있다. 


간이벽온방. 중종 19년 평안도 지역 전염병 때문에 조선 조정에서 만든 책으로 이후에도 여러차례 중간되었다.


이러한 몇 가지 안되는 방법을 가지고 조선 조정은 끊임없이 올라오는 전염병 환자 발생 장계와 사투를 벌였다. 중종 연간의 전염병 상황에서 조선 조정이 벌이는 필사적 노력은 분명히 평가해야 할 부분이 있다. 


하지만 문제는 조선 조정이 쓸 수 있는 카드-. 전염병 통제정책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20세기 들어 항생제와 공중보건위생의 보급으로 비로소 통제되기 시작한 전염병은 그 이전 조선시대사람들에게는 어떤 방법을 써서도 막을 수가 없는 무서운 질병이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사실 조선 조정의 노력 여부와 그 시절 전염병의 확산은 전혀 무관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나라에서 이를 막으려 해도 전염병은 전혀 개의치 않고 제 갈길 갔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계속) 


[스핀오프] 아웃브레이크: 조선을 공포로 몰아 넣은 전염병 (2)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