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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우리나라 잡곡과 도작은 기원을 달리하여
요서에서 남만주를 거쳐 들어온 잡곡과
산동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들어온 도작이
만나서 도작과 잡곡이 어우러진 혼합농경이 성립된 곳은 아마도 평양과 황해도 일대 서북지역일 것이라 하였다.
이 혼합농경이 더욱 남하하여 이루어진 판도가 세형동검문화와 얼추 맞아 떨어지지 않을까 한다.
따지고 보면 대략 고려의 천리장성 정도가 바로 혼합농경의 북방경계였을 것이라 보는데,
윤관정벌과 공민왕의 북벌, 세종대의 북벌 등은 모두 바로 이러한 혼합농경의 북벌과 궤를 같이 하지 않을까.
따지고 보면 윤관북벌 이후 우리나라 함경도 지역의 식민은
농업 기술 혁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
아래 지도를 보면 알수 있다.
삼국시대-고분시대 도작이 도달할 수 있는 위도는 북위 40도다.
일본도 저 북위 40도 선을 상당기간 넘지 못했다.
이 이상으로 도작을 끌고 올라가려면 농업기술의 혁신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공민왕-세종대인 14세기-15세기 연간에
바로 저 장벽을 넘어 북진하여 두만강 선까지 다다랐다.
이를 정치적 군사적 책동의 결과로만 보면 안 된다.
실제로 이를 가능하게 한 힘은 농업기술의 혁신이엇을 것이다.
저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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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권과 원 간섭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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