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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신라화한 비자벌 유력자의 죽음

by 한량 taeshik.kim 2020. 10. 28.

자문회의 자료(교동 63호분-최종).pdf
2.18MB

 

1천500년전 창녕 비화가야 지배자 무덤서 장신구 다량 출토
송고시간 2020-10-28 09:00
임동근 기자
금동관 등 피장자 착용 장신구 일체 발견…순장자 추정 치아·다리뼈도 확인

 

 

 

1천500년전 창녕 비화가야 지배자 무덤서 장신구 다량 출토 | 연합뉴스

1천500년전 창녕 비화가야 지배자 무덤서 장신구 다량 출토, 임동근기자, 문화뉴스 (송고시간 2020-10-28 09:00)

www.yna.co.kr

 

지금의 경남 창녕은 삼국시대에는 비자화比自火니 비사벌比斯伐이니 했으니 신라 진흥왕시대에 건립한 이른바 착녕척경비에서는 비자벌比子伐이라 했으니, 이와 더불어 그 진산인 화왕火王 역시 결국은 불[fire], 혹은 빛[light]라 요컨대 불처럼 혹은 빛처럼 활활 타는 고장이라는 뜻을 담았으리라 본다. 

 

63호분 및 주변 고분 전경(서-동)

 

이 창녕에 대해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제27 경상도慶尙道 창녕현昌寧縣에 이르기를 "동쪽 밀양부密陽府 경계까지 27리, 남쪽 영산현靈山縣 경계까지 10리, 서쪽 초계군草溪郡 경계까지 41리, 북쪽 현풍현玄風縣 경계까지 29리, 서울과는 7백54리"라고 하면서  

 

63호분 근경(서-동)

 

건치연혁建治年革에 이르기를 


본래 신라 비자화군比自火郡(또는 비사벌比斯伐이라고도 한다)이라 하던 곳으로 진흥왕眞興王 16년에 하주下州를 두었다가 21년에 혁파했고, 경덕왕景德王이 화왕군火王郡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가 지금 이름[창녕]으로 고쳤고, 현종顯宗이 밀성군密城郡에 소속시켰으며, 명종明宗이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조선]에서 예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고 했다. 

 

사진 4. 63호분 뚜껑돌 노출모습

 

그 이칭異稱으로는 비자화比自火ㆍ비사벌比斯伐ㆍ화왕火王ㆍ하주下州ㆍ창산昌山ㆍ창성昌城ㆍ하성夏城ㆍ하산夏山을 들었으니

 

유의할 점은 이곳이 가야 諸國 중 비화가야라 일컫던 곳 중심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지만 신라에 언제 편입되었는지는 도대체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다만 신라 진흥왕 16년(556)에 이곳에다가 하주下州를 설치하기 전에 이미 신라 비자화군이었으니, 진흥왕 시대 이전에 신라 영역에 확실히 편입된 것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63호분 뚜껑돌 4매 제거 후 모습

 

이곳 교동·송현동고분군이라는 삼국시대 공동묘지가 있으니, 이 일대가 신라시대 비자벌 일대를 주름잡은 유력 현지 지배층이 묻힌 곳이 있다. 다시금 유의할 점은 이 공동묘지는 신라시대 무덤이지, 네버에버 비화가야 시대 무덤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이 말이 신라영역에 편입되었다고 해서 이른바 현지 전통이 완전히 그날로 신라식으로 변모했다는 뜻은 아니다. 

 

이번에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파서 뜻밖에도 도굴당한 적이 없는 무덤을 하나 팠으니 금동관을 장착한 무덤 하나를 파제낀 것이다. 한데 금동관을 착용한 방식은 신라의 그것 그대로이면서, 조사단이 추정한 무덤을 만든 시기가 5세기 후반 내지 6세기 전반 사이라 하니, 요컨대 서기 500년 무렵에 만들었다는 뜻이다. 

 

63호분 석곽 내 유물 노출 모습

 

이때는 창녕이 비자벌군으로 일컫던 시절이면서 진흥왕에 의한 하주下州 설치가 있기 대략 반세기 이전이라, 이는 진흥왕 시대 이전에 창녕이 확실히 신라 영역에 포함됐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된다. 

 

덧붙여 이 무덤은 순장 흔적이 보인다는 점으로 보아 지증왕에 의한 순장 금지 조치가 있기 전에 만든 무덤임이 틀림없다. 소지왕 혹은 자비마립간 시대 무덤이다. 

 

그 발굴성과에 대해서는 추후 자세히 짚기로 하고 우선은 조사단 발표 자료를 소개한다. 그 약보고서는 이 글 맨 앞대가리에 문서로 첨부했으니 참고바란다. 

 

63호분 석곽 내 피장자 꾸밈유물 노출

 

도굴된 적 없는 창녕 가야 고분에서 금동관 포함 지배자 장신구 무더기 출토
-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Ⅱ군(63호분) 발굴성과 / 2명의 순장자 안치 공간도 -
-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발굴단원들이 11월 5일 온라인 설명회 통해 설명·답변 예정 -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소장 김지연)는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사적 제514호)’ 교동 Ⅱ군 63호분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해 비화가야 지배자의 꾸밈유물인 금동관을 비롯한 장신구 일체를 확인하였다. 

 

이번에 확인된 장신구 유물은 높이 약 21.5㎝의 금동관, 관에 드리운 금동 드리개와 금동 막대장식, 굵은고리귀걸이 1쌍, 유리구슬 목걸이, 은반지들, 은 허리띠 등 지배자 몸에 둘렀던 상태의 꾸밈유물 일체로, 신발이 발견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지난 9월 발굴돼 큰 화제가 되었던 경주 황남동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장신구 일체와 비슷한 구성이다. 

 

또한, 피장자 발치 바닥을 약 40㎝ 정도 낮춘 공간(길이 220㎝, 너비 130㎝)이 확인되었는데, 2명의 순장자가 안치된 공간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는 순장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치아 일부와 다리뼈 일부 등도 같이 확인되었다. 

 

금동관 내부 직물(관모)모습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2014년부터 비화가야 최고 지배층의 묘역인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중에서 미정비지역(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리 산5 일원)에 대한 학술 발굴조사를 시행해 왔다. 2019년 11월에 39호분의 봉토에 가려져 도굴되지 않은 63호분(봉토 지름 21m)의 매장주체부(시신 안치하는 곳)를 열었으며, 이후 올해 본격적으로 발굴조사를 진행해 매장 당시 피장자의 몸을 장식했던 금동관 등 꾸밈유물(着裝品, 착장품) 일체를 확인한 것이다. 

장신구들은 피장자에 부착했던 상태대로 발견되어서, 머리 부분에서는 금동으로 만든 관(冠)이, 양쪽 귀부분에서는 금으로 만든 굵은고리귀걸이(太環耳飾, 태환이식) 1쌍이 확인되었고, 목과 가슴에는 남색 유리구슬을 3~4줄로 엮어서 만든 구슬 목걸이가, 허리에는 은으로 만든 허리띠가 있었다. 손 부분에서는 은반지들이 확인되었다. 피장자의 몸을 장식한 꾸밈유물 일체가 온전히 확인된 것은 비화가야의 최고 지배층 고분에서는 최초의 사례다. 

 

금동관 내부 직물(관모) 세부



금동관(높이 약 21.5㎝)은 가장 아래에 관테(너비 약 3㎝)가 있으며, 그 위에 3단으로 이루어진 3개의 나뭇가지 모양 장식(樹枝形 立飾, 수지형 입식)을 세운 형태이다. 관테 아래에는 곱은옥(曲玉, 곡옥)과 금동구슬로 이루어진 금동드리개(金銅製垂飾, 금동제수식)가 양쪽에 있고, 관테 양 측면에는 원통형의 금동막대 장식이 드리워져 있다. 세움장식 밑면에는 관모(冠帽, 모자)로 추정되는 직물의 흔적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 관테: 대륜(帶輪)이라고도 하며 머리에 관을 쓸 수 있도록 둥글게 만든 띠

허리부분을 장식한 은허리띠(전체 너비 45㎝, 銀製帶金具, 은제대금구)에는 2개의 은장식 손칼(刀子)과 띠끝장식이 드리개로 덧붙여진 형태이다. 양손 부분에서는 각각 1개(오른손)와 3개(왼손)의 은반지(銀製指環, 은제지환)가 확인되었고, 피장자의 오른 팔뚝 부분에서는 팔찌나 손칼 장식으로 추정되는 원형금판에 연결된 곱은옥과 주황색 구슬들도 확인되었다. 

 

금귀걸이


이들 유물이 출토된 63호분의 석곽은 길이 640㎝, 너비 130㎝, 깊이 190㎝의 규모로, 피장자의 머리 방향은 남향이다. 피장자 주변에서 목질흔(木質痕)과 꺽쇠들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상자형 목관(箱形木棺)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피장자의 머리 위쪽에는 토기들과 철제유물들이 매납된 부장공간(길이 190㎝, 너비 130㎝)이, 피장자의 발치 아래에는 바닥을 약 40㎝ 정도 낮춘 순장 공간(길이 220㎝, 너비 130㎝)이 확인되었다. 


순장 공간에는 2명이 안치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순장자의 치아 일부와 다리뼈 일부, 금동제의 가는고리(細環, 세환) 1점, 항아리 2점, 철부(鐵釜, 쇠도끼) 2점, 철겸(鐵鎌, 쇠낫) 1점이 출토되었다. 순장 공간 곳곳에서도 꺽쇠가 다량 확인되고 있어 순장자도 목관에 안치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은허리띠, 은장식 손칼, 은반지 세부



지금까지 비화가야 지역에서는 일제강점기 이후 진행된 약탈과 도굴로 인해 당시 지배계층의 상징물이었던 금동관의 일부 편과 장신구만이 확인되었을 뿐 그 전모(全貌)를 알 수 없었다. 이번 조사로 비화가야 무덤의 축조기법과 장송의례를 이해하고 가야와 신라의 접경지역에 위치하여 복잡하고 다양한 문화가 나타나는 비화가야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고분 주변이 지나치게 협소해 현장을 직접 공개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만큼 오는 11월 5일 국립문화재연구소 유튜브를 통해 발굴 당시 녹화한 동영상을 공개하고, 발굴조사에 참여한 발굴단원들이 국민들과 언론의 궁금증에 실시간 댓글로 답변하는 온라인 발굴조사 설명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추정 구슬팔찌

 

국립문화재연구소 유튜브 채널:  www.youtube.com/nrichpr [11.5.(목), 14:00]

 

조사지역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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