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릉 묘권의 '大墓'와 관련해 내가 제출한 논문심사 보고서가 나한테 들어왔다. 결론을 요약하면 '수정후 게재'였다. 세 사람 중 한 사람은 수정없이 게재였고 다른 한 사람도 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한데 마지막 한 사람이 수정후 게재 의견을 낸 것이다. 그가 문제삼은 대목은 이랬다. 무령왕령 묘권에 보이는 구절 중 '登冠大墓'라는 말이 보이니 나는 이 구절의 '등관'은 지명이며 그것이 곧 백제 당시 지금의 공주 송산리 고분군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에 따른다면 무령왕과 무령왕비가 죽어 3년상을 지낸 다음 그것을 등관이라는 백제 왕가의 공동묘역에 안치했다는 뜻이 된다. '등관'이 지명이라는 주장은 이미 무령왕릉 발견 직후 청명 선생이 제기한 적이 있지만, 이후 아무도 거들떠 보지를 않았다. 이런 사정에서 내가 '등관'이 지명이라는 점을 다시 들고나왔던 것이다.
이런 내 주장에 문제의 심사자는 그 근거가 "임창순(청명)의 주장 외에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없다"고 반박했다. 이 심사보고 작성자를 나는 안다. 그래서 내가 이 대목을 집중적으로 수정했다. 그래서 수정한 논문에는 심지어 이런 구절까지 집어넣었다. 심사자 엿먹이는 구절이었다. 이 정도도 모르냐는 비아냥이었다.
"등관은 전후맥락으로 지명일수밖에 없다. 이것은 임창순이 그런 주장을 했기 때문에 지명이 아니라, 그것과 상관없이 지명이다."
나아가 나는 이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등관'이라는 지명은 그 생긴 모양이 마치 사람이 삿갓 같은 관을 쓴 모을 닮았기 때문에 이렇게 불렸다는 주장까지 덧붙였다. 이렇게 해서 수정후 게재한 논문은 게재됐다.
(2011.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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