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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13세에 즉위해 18살에 친정한 진평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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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은 재위 기간이 물경 53년(579∼632)에 달하니, 60년을 재위한 시조 혁거세에 이어 신라왕으로서는 두 번째로 긴 기간 왕위에 있었다.

그의 재위 마지막 해가 그가 죽은 해지만,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사서에서는 누락되었다.

다만 그가 어린나이에 즉위했을 것이라는 근거는 우선 재위기간이 지나치게 긴
데다가, 그의 계보를 검토할 때도 그러하다.

삼국사기 그의 본기에는 그에 대한 정보를 약술하기를 “이름은 백정白淨이며, 진흥왕眞興王의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만호부인萬呼夫人으로 갈문왕 입종立宗의 딸이다. 왕비는 김씨 마야부인摩耶夫人으로 갈문왕 복승福勝의 딸”이라고 했다.
 

진평왕의 계보



나아가 체구가 거대한 듯 “임금은 태어날 때부터 생김새가 기이하고 체구가 장대하였으며, 뜻이 깊고 굳세었으며, 지혜가 밝고 통달했다”고 했다.

극심한 근친혼 사회인 신라가 이 대목에서도 그런 사정을 여실히 보인다.

태자 동륜은 진흥왕과 사도부인思道夫人 사이에서 난 장자이며, 훗날 진지왕이 되는 금륜金輪의 형이다.

한데 동륜이 아내로 맞은 이가 입종 갈문왕의 딸 만호부인이라 한다. 입종은 진흥왕의 아버지다. 그런 까닭에 진흥과 만호는 적어도 아버지가 같다.

동륜은 고모를 아내로 맞은 것이다. 다만 우리는 만호부인의 어머니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입종은 형 법흥의 딸인 지소를 부인으로 맞아 진흥을 낳았다.

진흥왕본기를 보면 재위 27년(566) 2월에 기원사祇園寺과 실제사實際寺 두 절을 완공하는 한편 왕자 동륜銅輪을 왕태자王太子로 삼았으며, 진陳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나아가 이해에 황룡사皇龍寺를 완공했다.

이때 진흥은 이미 재위 30주년을 앞두고 있었지만, 7살에 즉위했으니 나이는 33살에 지나지 않았다. 한창 창성할 때였다.

동륜이 언제 태어났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동륜도 태자 책봉 6년 뒤인 진흥왕 재위 33년(서기 572) 3월에 원인 모를 이유로 죽고 만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동륜은 아버지의 후궁 중 한 명이 보명寶明이라는 여인에게 빠져서 밤마다 이 후궁이 머무는 전각을 뻔질나게 드나든 지 이레째 되는 날, 그곳을 지키는 개한테 물려죽었다고 한다. 참으로 개죽음이었다.

태자 동륜이 죽자 다음 보위 대상자는 당연히 그의 동생 금륜에게로 간다. 실제로 576년 아버지 진흥이 죽자 금륜이 즉위한다.

이러한 왕위 계승 과정이 우리는 순탄했을 줄로 알았다. 하지만 화랑세기를 통해 드러난 과정은 결코 그러지 못해, 각종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

이 음모에 결국은 진지왕이 재위 4년 만에 희생되어 579년 7월 17일에 발생한 쿠데타로 밀려났다.

진평왕이 몇 살에 즉위했는지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 있다. 신라는 그의 재위 6년(584) 봄 2월에 연호를 건복建福으로 바꾼다.

바꾼 시점을 보면 그 전 해에 새로운 연호를 준비해 시행한 결과임을 알 수 있다.

그 이전 연호는 진흥왕 33년(서기 572) 봄 정월에 제정한 홍제鴻濟였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해에 바로 진평왕이 어머니 만호 태후 품에서 벗어나 비로소 친정親政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13세에 즉위했다. 진평은 567년, 진흥왕 재위 28년에 태어났다. 따라서 그가 건복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점, 진평은 18세였다. 낭랑 18세였던 것이다.

한데 화랑세기에는 명확히 진평이 즉위할 때 나이가 13세였다고 나온다.




이를 엿보게 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다. 그의 할아버지 진흥왕 역시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의 즉위 당시 나이는 삼국사기의 7살과 삼국유사의 15살로 갈리지만, 전자가 맞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의 재위 12년(551) 봄 정월에 그의 할아버지이자 큰아버지인 법흥왕 23년(536) 이래 죽 사용한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버리고 개국開國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진흥왕은 534년에 태어났다. 개국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점은 그가 바로 18세에 달한 해였다.

할아버지 진흥이 18세가 되어 친정하기 시작하면서 연호를 바꾸었듯이 손자 진평 역시 같은 나이에 직접 통치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고자 연호를 바꾼 것이다.

(2016. 12. 13)

 
***

 
이는 새로운 시대가 서막을 열었음을 선포하는 순간이었다.

진평은 할아버지 못지 않은 야욕 팽배한 독재자였고 그리하여 걸핏하면 대규모 전쟁을 불사했고 때로는 직접 갑옷을 걸치고는 전장으로 돌진했다.

이토록 호전好戰하는 군주는 일찍이 없었다. 할아버지 진흥을 능가하는 야심 팽배한 군주였다. 

그의 진두지휘 아래 신라는 한강 지배를 확고히 하고 호시탐탐 남하하는 고구려를 무력으로 박살냈다.

이 힘이 마침내 그의 사후 삼십년만에 일통삼한으로 결실한다.

그의 치세에 일세의 영걸이 무럭무럭 실전 경험을 쌓아 출세가도를 달리며 성장했으니 
그가 바로 김유신이었다.

김유신은 진평의 조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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