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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익재선생 연보 益齋先生年譜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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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8~1367) 연보다. 그의 문집에서 전재한다. 

 

이제현 초상

 

부록 / [익재선생연보]
익재선생 연보 益齋先生年譜 

지원(至元) 24년 충렬왕(忠烈王) 14년 정해 12월 경진일에 선생이 탄생했다.


25년 무자 선생 2세
26년 기축 선생 3세
27년 경인 선생 4세
28년 신묘 선생 5세
29년 임진 선생 6세
30년 계사 선생 7세


31년 갑오 선생 8세
원정(元貞 원 성종(元成宗)의 연호) 원년 을미 선생 9세

 

2년 병신 선생 10세
대덕(大德 원 성종(元成宗)의 연호) 원년 정유 선생 11세
2년 무술 선생 12세
3년 기해 선생 13세
4년 경자 선생 14세


5년 신축 선생 15세
공(公)은 어릴 때부터 뛰어나게 영리하여 성인(成人)과 같았고, 글을 지을 줄 알고부터는 이미 작가(作家)의 기풍(氣風)이 있었는데 이해에 성균시(成均試)에서 장원급제하였고, 또 권 보(權溥)가 시관(試官)이 되었을 적에도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선생은 말하기를 ‘과거는 작은 재주이니, 이것으로 나의 덕(德)을 크게 기르기에는 부족하다.’ 하였다. 경서(經書)를 토론하는 데 있어서는 널리 알고 정밀하게 연구, 절충하여 지당한 데 이르게 하니, 문정공(文定公)이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하늘이 아마도 우리 가문(家門)을 크게 번창시키려는 것인가.’ 하였다. 부인 권씨(權氏)를 맞아들였는데, 권씨는 문정공(文正公) 국재(菊齋) 보(溥)의 딸이다. 국재가 지공거(知貢擧)로 있었던 것을 계기로 선발하여 사위로 삼았다.

 

6년 임인 선생 16세
7년 계묘 선생 17세
8년 갑진 선생 18세
9년 을사 선생 19세
10년 병오 선생 20세


11년 정미 선생 21세
지대(至大 원 무종(元武宗)의 연호) 원년 무신 선생 22세
예문관(藝文館)ㆍ춘추관(春秋館)에 선발되어 들어가니, 관중(館中)의 사람들이 추대하여 사양하면서 감히 글에 대하여 논하지 못하였다. 이해 겨울에 제안부 직강(齊安府直講)에 승진되었다.


2년 기유 충선왕(忠宣王) 원년 선생 23세
사헌규정(司憲糾正)에 발탁되었다.


3년 경술 선생 24세
선부 산랑(選部散郞)에 승진하였다.


4년 신해 선생 25세
다시 전교시 승(典校寺丞)과 삼사판관(三司判官)에 전임되었는데, 있는 곳마다 직무에 충실하였다.

 

황경(皇慶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원년 임자 선생 26세
서해도 안렴사(西海道按廉使)에 선발되었는데 옛날 절도사의 풍도가 있었으며, 성균악정(成均樂正)에 올랐다. 겨울에는 제거풍저창사(提擧豐儲倉事)가 되었다.


2년 계축 선생 27세
내부 부령(內府副令)ㆍ풍저감 두곡(豐儲監斗斛)에 제배되었는데, 내부(內府)에서 치수(錙銖)와 척촌(尺寸)을 세밀히 계산할 적에도 전혀 어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공(李公)은 기국(器局)을 한정할 수 없는 군자이다.”
하였다.


연우(延祐 원 인종(元仁宗)의 연호) 원년 갑인 충숙왕(忠肅王) 원년 선생 28세

이때에 정주학(程朱學)이 중국(中國)에 행해지기 시작하였으나 우리나라에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었는데, 백이정(白頤正)이 원(元) 나라에 있다가 이를 배워 우리나라로 돌아오자, 선생이 제일 먼저 사사하여 전수받았다.
전에 충선왕(忠宣王)이 원 인종(元仁宗)을 도와 내란(內亂)을 평정하고 무종(武宗)을 영립(迎立)하였으므로, 양조(兩朝)의 총우(寵遇)가 비길 데 없이 컸다. 왕이 드디어 주청(奏請)하여 충숙왕(忠肅王)에게 전위(傳位)하고, 자신은 태위(太尉)로 경사(京師)에 있으면서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학문 연구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인하여 이르기를,
“경사의 문학사(文學士)는 모두 천하에서 선발한 사람들인데, 나의 부중(府中)에는 아직 이런 사람이 없으니, 이것이 나의 수치다.”
하고 선생을 불렀으므로, 경사에 갔었다. 원(元) 나라의 학사인 요수(姚燧)ㆍ염복(閻復)ㆍ원명선(元明善)ㆍ조맹부(趙孟頫) 등이 모두 왕(王)의 문하에 놀았는데, 선생도 그들과 종유(從游)하면서 학문이 더욱 진보되었으므로 제공(諸公)이 칭찬하여 마지않았다. 상왕(上王)이 선생에게 묻기를,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문물(文物)이 중국과 같다고 일컬어왔는데, 지금 학자(學者)들은 모두 불교(佛敎)를 추종하고 있으며, 장구(章句)나 익혀 문장을 꾸미는 무리들이 번성하고 있는 반면, 경서(經書)에 밝고 행실을 닦는 선비가 매우 적은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니, 이에 대하여 선생이 답한 내용은 대략,
“전하께서 진실로 상서(庠序)와 학교(學校)를 넓혀 근엄하게 하고 육예(六藝)와 오교(五敎)를 높여 밝힘으로써 선왕(先王)의 도(道)를 천명(闡明)하신다면, 어찌 진유(眞儒)를 배반하고 불교를 추종할 리가 있겠으며 실학(實學)을 버리고 장구를 익힐 자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앞으로는 문장을 꾸미기만 하던 무리들이 모두 경서에 밝고 행실을 닦는 선비가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니, 왕이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다.


2년 을묘 선생 29세
선부 의랑(選部議郞)에 승진되었고 가을에는 성균좨주(成均祭酒)를 겸하였다.

 

3년 병진 선생 30세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으며, 4월에는 진현관 제학(進賢館提學)으로 사명(使命)을 받들고 서촉(西蜀)에 갔었는데, 이르는 곳마다 시를 지었는데 사람들에게 즐겨 애송(愛頌)되고 있다.


4년 정사 선생 31세
선부 전서(選部典書)에 임명되었고, 9월에는 명(命)을 받들고 원(元) 나라에 가서 상왕(上王)의 탄일(誕日)을 축하하였다.

 

5년 무오 선생 32세

 

6년 기미 선생 33세
강남(江南)에 강향사(降香使)로 가는 상왕(上王)을 호종하였는데, 상왕이 이름난 누대(樓臺)와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 흥이 일어 회포를 풀 적마다, 조용히 말하기를,
“이러한 곳에 이생(李生)이 없을 수 없다.”
하였다. 상왕이 고항(古杭) 오수산(吳壽山)을 불러 선생의 초상을 그리게 하였는데, 북촌(北村) 탕선생(湯先生)이 찬(贊)을 썼다. 그 뒤 32년 만에 선생이 국표(國表)를 받들고 경사(京師)에 갔다가 자신의 초상을 보고,
“내가 예전에 그림자를 남겼다.[我昔留形影]”
하고 읊은 시구가 있다.


7년 경신 선생 34세
7월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號)를 하사받았고, 또 토지와 장획(臧獲)을 하사받았으니, 이는 오(吳)ㆍ연(燕) 지방에서 시종(侍從)한 공 때문이었으며, 주청(奏請)하여 고려왕부 단사관(高麗王府斷事官)을 제수하였다. 9월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최용갑(崔龍甲)ㆍ이곡(李穀) 등을 뽑았는데, 왕이 인재 얻은 것을 가상히 여겨 은병(銀甁) 50개와 쌀 1백 석(石)을 주어 학사연(學士宴)의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겨울에 원(元) 나라에 가다가 황토점(黃土店)에 이르러, 상왕(上王)이 참소를 받았는데 능히 스스로 변명하지 못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시(詩) 3편을 짓고, 또 명이행(明夷行) 1편을 지었다.


지치(至治 원 영종(元英宗)의 연호) 원년 신유 선생 35세
이때에 상왕이 토번(吐蕃)의 철사결(撤思結)이라는 곳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경사(京師)와의 거리가 1만 5천 리였다. 선생이 경사의 왕저(王邸)를 지키면서 시를 지어 유청신(柳淸臣)ㆍ오잠(吳潛)에게 보내고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토로하였다. 문정공(文定公) 동암(東菴)의 상(喪)을 당하였다.


2년 임술 선생 36세


3년 계해 선생 37세
원(元) 나라가 중국과 같이 우리나라에도 정동성(征東省)을 설치할 것을 의논하므로, 선생이 원 나라에 가서 도당(都堂)에 《중용(中庸)》의 구경장(九經章)에 있는 ‘먼 데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으로 글을 올려 변명(辨明)하고, 그 나라와 그 사람은 그대로 있게 하여 달라고 청하니, 그 의논이 드디어 중지되었다.
때에 상왕이 아직 토번에 있었으므로 선생이 원 나라의 낭중(郞中)과 승상(丞相) 배주(拜住)에게 글을 올려 돌아오게 하여 줄 것을 청하였는데, 말의 뜻이 간측(懇惻)하고 충분(忠憤)이 격절하였다. 이에 감동한 배주가 황제에게 청하여 타사마(朶思麻)라는 곳으로 양이(量移)되었다. 선생이 상왕을 배알하러 갔었는데, 농산(隴山)을 넘고 조수(洮水)를 건너는 험한 길을 가면서 도중에 읊은 시(詩)들은 모두 충분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 여행 길에서 측천무후(則天武后)의 묘(墓)를 지났는데, 시 한 편을 남겼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어찌 주 나라의 여분으로 / 那將周餘分
우리 당 나라의 일월을 더럽혔는가 / 黷我唐日月
또 짧은 서(序)를 지어 구양수(歐陽脩)의 잘못을 기롱하였는데, 뒤에 주자(朱子)의,
어찌하여 구양자는 / 如何歐陽子
사필잡고 지극히 공정한 사실을 흐리게 했는가 / 秉筆迷至公
한 감흥시(感興詩) 1편을 얻어 보고 스스로 자신의 식견(識見)이 정대하였음을 알았다.


태정(泰定 원 진종(元晉宗)의 연호) 원년 갑자 선생 38세
광정대부(匡靖大夫) 밀직사사(密直司事)가 되었다.


2년 을축 선생 39세
추성량절(推誠亮節)로 공신호를 고쳐 하사했으며, 다시 첨의평리(僉議評理)ㆍ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전임(轉任)되고, 김해군(金海君)에 봉하였다.


3년 병인 선생 40세
삼사사(三司使)에 옮겨졌다.


4년 정묘 선생 41세
치화(致和 원 문종(元文宗)의 연호) 원년 무진 선생 42세


2년 기사 선생 43세

 

지순(至順 원 문종(元文宗)의 연호) 원년 경오 선생 44세
충혜왕(忠惠王)이 다시 왕위에 올랐다. 다시 정당문학을 삼았으나 얼마 안 되어 파하였다.

 

2년 신미 선생 45세


3년 임신 충숙왕 후원년선생 46세
원통(元統 원 영종(元寧宗)의 연호) 원년 계유 선생 47세

 

2년 갑술 선생 48세
후 지원(後至元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원년 을해 선생 49세

 

2년 병자 선생 50세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영예문관사(領藝文館事)가 되었다.

 

3년 경축 선생 51세
4년 무인 선생 52세


5년 기묘 선생 53세
2월에 충숙왕(忠肅王)이 훙(薨)하였다. 가을에 정승(政丞) 조적(曹頔)이 백관(百官)을 위협하여 군대를 영안궁(永安宮)에 주둔시키고, 임금 곁의 나쁜 소인들을 쫓아내기 위해서라고 선언(宣言)하면서, 몰래 심왕(瀋王)의 지반(地盤)을 만들었다. 이 사실을 안 충혜왕(忠惠王)이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쳐 죽였으나, 그 당여(黨與)로서 경도(京都)에 있는 자가 많아 왕을 기필코 죄에 얽어 넣으려 하였다. 이리하여 원(元) 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왕을 부르니 인심(人心)이 의아해 하고 불안하게 여겼으며, 장차의 화를 예측할 수 없게 되자 선생은 격분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내가 우리 임금의 신하인 것만 알 뿐이다.”
하고, 왕을 모시고 경도에 가서 말 대신 글을 올려 일이 순리대로 변별(辨別)되었다.


6년 경진 충혜왕 후원년선생 54세
4월에 우리나라로 돌아오다가 제화문(齊化門) 주루(酒樓)에서 읊은 시가 있다. 돌아와서는 뭇 소인이 더욱 치열하게 날뛰므로, 공이 자취를 숨기고 나아가지 않았다.


지원(至元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원년 신사 선생 55세

 

2년 임오 선생 56세
여름에 《역옹패설(櫟翁稗說)》을 저술하였다.


3년 계미 선생 57세
11월에 원 나라 사신 타적(朶赤) 등이 와서 교천사조(郊天赦詔)를 반포한다 하므로 왕이 성 밖에 나아가 영접하니, 타적 등이 칼을 들이대고 왕을 잡아 말에 태우고 돌아갔다.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군신(群臣)이 정신이 없어 어떻게 조처해야 할 줄을 몰랐는데, 선생이 글을 올려 사면(赦免)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4년 갑신 선생 58세
겨울에 충목왕(忠穆王)이 나이 8세로 즉위하여 선생을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제배하고, 부원군(府院君)에 승진시켜 영효사관사(領孝思觀事)를 삼았다. 서연(書筵)을 설치하고 선생을 스승으로 삼았는데, 선생이 진언(進言)하기를,
“옥(玉)에 흠집이 있는 것은 반드시 양공(良工)이 다듬은 뒤에라야 보기(寶器)가 되는 것입니다. 임금인들 어찌 모든 일에 대하여 잘못이 없겠습니까. 반드시 양신(良臣)의 간언(諫言)이 있은 뒤에라야 성덕(聖德)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하였으며, 인하여 아뢰기를,
“신등이 시강(侍講)에 참여하지 못할 적에는 마땅히 늘 원송수(元松壽)를 좌우에 두시어 도의(道義)를 강마(講磨)하소서.”
하였다. 선생은 또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다시 어진 선비 2인을 가려서 《효경(孝經)》ㆍ《논어(論語)》ㆍ《맹자(孟子)》ㆍ《대학(大學)》ㆍ《중용(中庸)》을 강(講)하게 하여, 격물(格物)ㆍ치지(致知)ㆍ성의(誠意)ㆍ정심(正心)의 도(道)를 익히게 하고, 또 정직하고 근후(謹厚)하고 배우기를 좋아하고 예(禮)를 사랑하는 자 10명쯤을 선발하여 좌우(左右)에서 보도(輔導)하게 하고, 재상(宰相)을 친하게 하고 설압(褻狎)하는 무리를 내칠 것이며, 성색(聲色)과 완호물(翫好物)을 이목(耳目)에 접하지 못하게 하여야 합니다. 이리하여 습관이 성품과 함께 완성되면 덕(德)으로 나아감을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고, 이어,
“정방(政房)을 혁파하여 청알(請謁)을 근절시키고 공과(功過)를 기록하여 요행의 문을 막을 것이며, 금은(金銀)ㆍ금수(錦繡)의 사용을 금지시켜 검소한 덕을 밝힐 것이며, 못 받아들인 공부(貢賦)를 견면(蠲免)하여 줌으로써 민생(民生)을 편안하게 하소서.”
하였다. 뒤에 금성군(錦城君) 나익희(羅益禧)에게 말하기를,
“내가 전에 두서너 가지 계책으로 집정자(執政者)들을 깨우쳤으나 시행되는 것을 못 보았으므로, 늘 과감하게 물러가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었다.”
하고, 드디어 글을 올려 물러가기를 빌었다.


5년 을유 선생 59세


6년 병술 선생 60세

전(箋)을 올려 서연강설(書筵講說)의 직(職) 면하여 주기를 빌면서, 찬성사(贊成事) 안축(安軸)ㆍ밀직부사(密直副使) 이곡(李穀)을 천거하여 자신의 직을 대신하게 하였다. 5월에 《효행록(孝行錄)》의 62효찬(孝贊)을 짓고, 또 서(序)를 지어 첫머리에 실었다. 11월에 왕(王)이 민지(閔漬)가 찬수한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에 빠진 것이 많다는 것으로 선생에게 명하여 다시 찬수하게 하였으며, 또 명하여 충렬왕(忠烈王)ㆍ충선왕(忠宣王)ㆍ충숙왕(忠肅王) 3조(朝)의 실록(實錄)을 찬수하게 하였다. 문정공(文正公) 국재(菊齋)의 상(喪)에 조문하였다.


7년 정해 선생 61세


8년 무자 선생 62세
3월에 경사도감 제조(經史都監提調)에 임명되었으며, 12월에 충목왕(忠穆王)이 훙(薨)하였으므로, 선생이 표(表)를 받들고 원(元) 나라에 가서 충정왕(忠定王) 세우기를 청하였다.


9년 기축 충정왕 원년 선생 63세


10년 경인 선생 64세


11년 신묘 선생 65세
겨울에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여 아직 우리나라에 도착하기 전에 선생을 우정승(右政丞) 권단정동성사(權斷征東省事)에 임명하였는데, 선생이 글을 올려 굳게 사양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또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임명하였는데, 선생이 법사(法司)로 하여금 각 도의 존무사(存撫使)ㆍ안렴사(按廉使)의 공과(功過)를 고핵(考覈)하게 하고, 홍원철(洪元哲)을 평양도 순문사(平壤道巡問使)로 보내고, 김용(金鏞)으로 왜적을 방비하게 하고, 허유(許猷)를 서북면 찰방(西北面察訪)으로 삼고, 배전(裵佺)ㆍ박수문(朴守文)을 행성(行省)의 옥에 가두고, 노영서(盧英瑞)ㆍ윤시우(尹時遇)를 유배(流配)보내고, 한대순(韓大淳)ㆍ정천기(鄭天起)를 폄하(貶下)하였다. 이때 왕이 원 나라에 있어서 두어 달 동안 나라가 비어 있었으나, 선생이 잘 조처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이를 힘입어 안정되었다.


12년 임진 공민왕 원년 선생 66세
서연(書筵)을 열고 다시 선생을 시강(侍講)에 임명하였다. 조일신(趙日新)이 왕을 시종(侍從)한 공을 믿고 교만하고 방자하게 횡포를 부렸었는데, 선생이 자기보다 윗자리에 있게 됨을 시기하였다. 선생은 이 사실을 알고 왕에게 아뢰기를,
“신은 감히 정승의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굳게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말에서 떨어져 발을 다친 것을 인하여 전(箋)을 올려 사양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고 추성량절동덕협의찬화(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의 공신호를 더 내렸다. 선생이 또 전을 올려 굳게 사양하니, 왕이 특별히 좌부대언(左副代言) 유숙(柳淑)과 응양상장군(鷹揚上將軍) 김용(金鏞)을 보내어 교지(敎旨)를 내리고 사직하려는 청은 윤허하지 않았다. 선생이 또 전을 올려 기필코 사양하여 마지 않으니 드디어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그해 겨울 일신(日新)이 불령배(不逞輩)를 모아가지고 밤에 궁중으로 들어가 평소에 자기가 시기하던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 죽였는데, 선생은 작위(爵位)를 사퇴하였으므로 화(禍)를 면하였다. 일신(日新)이 복주(伏誅)되자 선생을 기용하여 우정승(右政丞)으로 삼고 순성직절동덕찬화(純誠直節同德贊化)의 공신호를 내렸다.


13년 계사 선생 67세
정월에 정승을 사임하였고, 5월에 부원군(府院君)으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색(李穡) 등을 뽑았으며, 동지공거(同知貢擧) 홍 이상(洪二相 이상은 홍언박(洪彦博)을 말한다)에게 준 시(詩) 2수(首)가 있다.

 

14년 갑오 선생 68세
12월에 다시 우정승이 되었다.

 

15년 을미 선생 69세
우정승 직을 사임하였다.

 

16년 병신 선생 70세
역신(逆臣) 기철(奇轍) 등이 복주(伏誅)되자, 왕(王)이 기철 등의 재산(財産)을 양부(兩府)에 하사하였으나, 선생은 공이 없다는 것으로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12월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17년 정유 선생 71세
5월에 본직(本職)으로 치사할 것을 청하니, 윤허하였다. 나라의 제도에 봉군(封君)으로 치사하면 반사(頒賜)하는 녹(祿)에 차등이 있었는데, 이미 늙었으면서 후한 녹을 받는 것이 의(義)에 있어 불안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청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정(朝廷)의 의논은 본직으로 치사하게 하는 것은 대신(大臣)을 공경하는 도리가 아니라 하였다.
선생은 지위를 버리고 한가히 지내게 되자, 손을 맞이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고금(古今)의 일에 관하여 비교하고 토론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왕이 반드시 사람을 시켜 자문하였다. 혹 수시로 인견(引見)하여 경사(經史)를 강론하면서 치도(治道)를 묻기도 하였는데, 그때마다 선생은 전례를 끌어다 비유하여 진달하면서 하기 어려운 일을 하도록 간절히 권면(勸勉)하니, 왕이 더욱 공경하고 중히 여겼다.
집에서 국사(國史)를 찬수(撰修)할 적에는 사관(史官) 및 삼관(三館)이 다 모였었는데, 뒤에 국사는 병화(兵火)에 잃어버렸다. 또 《금경록(金鏡錄)》을 선(選)하였다. 또 국사가 미비함을 못마땅하게 여겨 기년(紀年)ㆍ전(傳)ㆍ지(志)를 찬수하였는데, 뒤에 홍건적(紅巾賊) 난리에 유실되고 오직 태조(太祖)에서 숙종(肅宗)에 이르기까지의 기년(紀年)만이 남았다. 8월에 왕이 선생에게 명하여 종묘(宗廟)의 소목위차(昭穆位次)를 정하게 하니, 선생이 이에 대한 의(議)를 올렸다.


18년 무술 선생 72세
왕(王)이 경성(京城)을 수축할 적에 기로(耆老)ㆍ대신(大臣)에게 방문(訪問)하였는데, 이때 선생이 글을 올렸다. 그 대략은,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 이상은 알 수 없지만 삼대 이하로는 도읍을 세우고서 성곽(城郭)을 쌓지 않았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우리 태조께서 동쪽을 정벌하고 서쪽을 쳐서 참람한 무리를 평정하여 삼국(三國)을 통일시킨 뒤 7년 만에 훙(薨)하셨습니다. 그때 피폐한 백성을 동원하여 토목(土木)의 역사(役事)를 일으키는 것은 차마 못할 일이었으니, 송경(松京)에 성(城)을 쌓지 않는 것은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형세가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였다. 안렴사(按廉使) 박대양(朴大陽)을 전송한 시(詩)가 있고, 또 정조(正朝)에 대한 시가 있다.

 

19년 기해 선생 73세
손자 보림(寶林)을 위하여 집정(執政)에게 보낸 시가 있다.

 

20년 경자 선생 74세

 

21년 신축 선생 75세

2월에 왕이 선생에게 명하여 《서경(書經)》 무일편(無逸篇)을 강하게 하였다.

 

22년 임인 선생 76세
홍건적(紅巾賊)이 서울을 함락시켜 어가(御駕)가 남쪽 지방으로 파천(播遷)하자 선생이 달려가 상주(尙州)에서 배알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탄식하기를,
“오늘의 이 파천이, 당 현종(唐玄宗)이 안록산(安祿山)의 난(亂) 때문에 서촉(西蜀)으로 파천하였던 것과 무엇이 다르랴!"
하였다. 또 홍언박(洪彦博)에게 말하기를,
“옛사람이 일컫기를 ‘웅장하구나 산하(山河)여! 이는 위(魏) 나라의 보배다.’ 하였으니, 애초에 요해처(要害處)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협애(狹隘)한 목을 지켰다면 승리를 기필할 수 있었을 것인데, 일찍 도모하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소. 만약 적과 들에서 싸웠다면 반드시 아군(我軍)이 패배하였을 것이나, 단 눈이 내리는 것을 이용하여 적이 생각지도 않은 틈을 노려 공격하였으므로 이겼으니, 이는 종묘(宗廟)와 산하(山河)의 도움이오.”
하였다. 인하여 어가를 호종하고 청주(淸州)에 이르렀으며, 선생이 공북루(拱北樓)에 올라 임금의 명에 의하여 판상(板上)의 시운(詩韻)에 따라 시를 지어 올렸다. 다시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하여졌다.


23년 계묘 선생 77세
왕(王)이 청주에 있으면서 오랫동안 환도(還都)하지 않았으므로, 선생이 모든 재상(宰相)들을 인솔하고 가서 진언(進言)하기를 ‘송도(松都)는 종묘(宗廟)가 있는 곳이요 국가의 근본이니, 속히 환가하셔서 백성의 바라는 마음을 위로하소서. 서운관(書雲觀)에서 음양(陰陽)의 구기(拘忌)로 아뢰었으니, 마땅히 먼저 성남(城南)의 흥왕사(興王寺)에 주가(駐駕)하였다가, 강안전(康安殿)이 수리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니, 왕이 따랐다.


24년 갑진 선생 78세


25년 을사 선생 79세
왕(王)이 신돈(辛旽)을 총애하므로, 선생이 왕에게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한 번 돈(旽)을 만났었는데, 그의 골상(骨相)이 옛날 흉인(凶人)과 비슷하여 반드시 후환(後患)을 끼칠 것이니, 상께서는 가까이 하지 마소서.”
하였는데, 이로하여 신돈이 깊은 원심을 품고 온갖 방법으로 헐뜯었으나, 선생이 늙었기 때문에 가해(加害)하지 못하였다. 돈이 왕에게 아뢰기를,
“유자(儒者)들은 좌주(座主)니 문생(門生)이니 일컬으면서 안팎으로 포열(布列)하여, 서로 돌려가면서 간청(干請)함으로써 하고 싶은 짓을 멋대로 하고 있습니다. 이 제현(李齊賢) 같은 사람은 그의 문생(門生)의 문하에 또 문생이 있어 드디어 나라에 가득찬 도둑이 되었으니, 유자의 해(害)가 이와 같습니다.”
하였는데, 신 돈이 패하여 실각하자, 왕이,
“익재(益齋)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은 따를 수 없다.”
하였다. 선생은 젊어서부터 동료들이 감히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반드시 익재라고 불렀으며, 재상이 되고 나서는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익재라 불렀으니, 선생이 세상 사람들에게 존대받음이 이러하였다.
6월에 조마(照磨) 호약해(胡若海)가 명주사도(明州司徒) 방국진(方國珍)의 사신으로 와서 방물(方物)을 바치고 돌아갈 적에 선생에게 시(詩)를 청하였는데, 이때 선생은 노쇠하였으므로 글짓는 것을 꺼렸으나 너무 정성스럽게 청하므로, 이에 오언시(五言詩) 1편(篇)을 지어 주었다. 이로부터는 다시 저술(著述)하지 않았다.

 

26년 병오 선생 80세


27년 정미 선생 81세
가을 7월에 병으로 사제(私第)에서 졸(卒)하였는데, 태상(太常)에서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겨울 10월에 유사(有司)가 위의(衛儀)를 갖추어 우봉현(牛峯縣) 도리촌(桃李村) 선영(先塋) 아래 장사하였다.
홍무(洪武) 9년 병진에 공민왕(恭愍王)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였다.

 


[주-D001] 지공거(知貢擧) : 
과거(科擧)의 고시관(考試官)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의 위이다. 그 과거에서 합격된 자는 이 지공거를 좌주(座主) 또는 은문(恩門)이라 부르면서, 평생 문생(門生)의 예(禮)를 다하였다.

 

[주-D002] 상서(庠序)와 학교(學校) : 
상(庠)ㆍ서(序)ㆍ교(校)는 모두 향교(鄕校)를 말하고, 학(學)은 국학(國學)으로 곧 태학(太學)을 말한다. 《孟子》 滕文公 上에 “하(夏) 나라에서는 교(校)라 하였고, 은(殷) 나라에서는 서(序)라 하였고, 주(周) 나라에서는 상(庠)이라 하였는데, 학(學 : 태학〈太學〉임)은 삼대(三代)가 다 같았다.” 하였다.


[주-D003] 육예(六藝)와 오교(五敎) : 
육예는 선비로서 배워야할 여섯 가지 일로 곧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이며, 오교는 즉 오륜(五倫)으로 부자(父子)의 친애, 군신(君臣)의 의리, 부부(夫婦)의 분별, 장유(長幼)의 차서, 붕우(朋友)와의 신의를 말한다.
[주-D004] 구양수(歐陽脩)의 …… 기롱하였는데 : 


당 고종(唐高宗)의 황후인 측천무후(則天武后)가 고종이 죽은 뒤에 중종(中宗)ㆍ예종(睿宗)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의 위(位)에 올라 국호를 주(周)라 하였었다. 이는 《춘추(春秋)》의 필법으로 보면 정통(正統)이 아니므로 본기(本紀)에 넣어서는 안 되는데, 구양수가 《당서》를 찬술하면서 측천무후기를 넣은 것은 잘못이라는 말이다.


[주-D005] 태상(太常) : 
태상부(太常府)인데, 제사(祭祀)와 증시(贈諡)를 맡은 관아(官衙)이다. 충렬왕(忠烈王) 24년에 봉상시(奉常寺)로 개정(改定)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장순범 정기태 (공역) |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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