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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쌍분과 쌍탑

by 한량 taeshik.kim 2020. 9. 17.

 

경주 대릉원 황남대총

 

 

남쪽과 북쪽에 별도 봉분을 잇대어 쌓아 만든 경주 황남대총은 두 봉분을 구별하고자 각기 위치하는 방향에 따라 북쪽에 있는 것을 북분北墳이라 하고, 남쪽에 있는 것을 남분南墳이라 한다.

적석목곽분 시대 신라 무덤에는 이런 사례가 적지는 아니해서, 현재까지 발굴된 것으로 3곳 정도가 아닌가 하는데(하도 경주시내를 까디빈 데가 많아 사례는 세밀히 조사하면 증가할 것이다)

 

내가 세심하게 살피지 아니해서 자신있게 말할 순 없거니와, 대략의 기억대로 말하자면 북쪽이 여성, 남쪽이 남성으로 패턴화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둘은 현재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관계와 관련한 답은 부부다.

 

 

대릉원 내 다른 쌍분

 

 

적석목곽분은 그 구조상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효율성이 너무 적어 같은 봉분에다가 부부를 함께 매장하는 이른바 단일 봉분 합장合葬이 불가능하거나 그에 가깝다. 합장하려 한다면 저 크고 복잡한 무덤을 다시 까부셔야 하는 까닭이다. 

 

물론 부부가 한꺼번에 패몰敗沒한다면 이런 일이 가능하겠지만, 부부가 그리 함께 죽는 일이 아주 드물다. 죽는 시기가 다르다는 점에서 골치 아픈 문제가 발단하니, 그래도 부부랍시고 합장은 해야겠지, 신라가 개발한 제도는 각기 다른 봉문을 조성하되 그 봉분을 잇대어 만들어놓음으로써 두 사람은 생전에 살을 섞은 사이였음을 표시하는 거다. 

 

 

단분單墳인 천마총. 그 내부 구조인데 논란이 좀 있기는 하나, 대체로 이런 구조다. 이런 무덤을 어케 다시 까고 나중에 죽은 사람을 함께 묻겠는가?

 

 

이런 문제가 나중에는 결국 6세기를 지나 석실분石室墳 형태로 가서 무덤에다가 대문을 만들어 그 대문을 따고서는 나중에 죽은 사람 시체를 갖다 묻어주는 합장 형식으로 변화하게 된다. 

 

황남대총은 봉분이 잇닿은 부분을 팠더니만, 북쪽 무덤이 남쪽 무덤을 파고 들어간 것으로 드러났다. 뭐 볼짝없다. 이건 개돼지도 하는 일이니, 당연히 북쪽 무덤을 나중에 만들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여러 양상으로 보아 북쪽은 여자, 남쪽은 남성으로 보아 대과가 없을 듯하다. 부부라고 한다면 여자가 남자보다 오래 산 셈이다.

 

 

단분單墳과 쌍분雙墳

 

 

늦게 죽었다는 것이 더 오래 살았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남자가 훨씬 나이가 많았을 수도 있다. 아울러 그때나지금이나 평균연령은 여자 높았으니, 아마 여자가 오래도록 딩가딩가하며 살다가 죽지 않았을까 한다.  

 

이 쌍분 雙墳 혹은 합장시스템이 나중에 불교가 상륙 확산하면서 동서 쌍탑 東西雙塔 제도를 낳게 된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탑은 부처님 무덤이라는 점을 하시何時도 잊어서는 안 된다.

 

 

경주 남산동 동서 삼층석탑

 



덧붙여 이 쌍분은 대체로 부부를 묻은 합장분 일종이기에 그 배치와 패턴에서 강렬한 음양陰陽사상을 반영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도 안 된다. 남자는 여자에 대해 양陽이며 동쪽은 서쪽에 대한 양이고 북쪽에 대해선 남쪽이 양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불탑으로 말하면 동서 쌍탑 중 동탑이 서탑에 대해선 양탑陽塔이며 남북 쌍분에 대해선 남분에 겨냥해 북분이 음분陰墳이다.

 

****

 

애초 이 얘기를 하려 함이 아니었다. 다만 서두가 각중에 길어졌고, 그렇다 해서 그걸 줄이거나 삭제하자니 아까워 별도 항목으로 독립한다. 

이 강연 원고는 아래 유튜브에도 올렸으니 참고바란다.

이 동영상에서는 음양오행, 특히 음양설이 이런 쌍분 쌍탑을 태동케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내용이 추가됐으니 신라사회에 이런 음양설이 일대 파란을 일으킨 시기를 나는 고고학 연대로 치환하면 적석목곽분 개시기 이후로 봤다.

다시 말해 신라사회는 빠르면 3세기, 늦어도 4세기엔 음양설이 풍미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덧붙여 나는 동아시아문화권을 여타 문화권과 구별하는 지표 중 하나로써 음양오행설을 지적하면서 중국 기준으로 대략 기원전 300년 이후 250년 무렵 종시오덕설을 앞세운 추연에서 비롯함을 지적하면서 이런 음양오행설이 인간과 우주의 태동 원리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발명된 것임을 주장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동아시아문화권에서는 존재론 우주론 인식론이 없거나 있어도 빈약할 수밖에 없으니 그런 갈증을 일거에 풀어준 것이 바로 불교였다.

불교는 동아시아문화권에선 듣도보도 못한 것을 들고나왔으니 바로 존재론과 인식론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가는가 하는 의문은 종래엔 있지도 않았고 그런 까닭에 물을 필요도 없었다. 이를 불교는 연기론이니 하는 것들로 맹렬히 파고 들었다.

이에 격발된 이들이 유학이었다. 어찌 살아야하는가 하는 생활도덕만 알던 이들은 겉으로는 불교가 부모도 임금도 몰라본다 비아냥하고 탄압하려 했지만 불교가 내장한 저 인식론 존재론이 얼마나 강력한 무기인지는 알았다.

번번한 논쟁에서 명함도 끼지 못하는 유학이 마침내 성리학을 통해 기지개를 켜니 성리학이 별건가? 유학에다가 존재론과 인식론을 이식한 흐름이다. 



https://youtu.be/w0N4stjMX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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