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화랑세기가 폭로한 포석정
경애왕 비극의 주무대인 경주 포석정이 화랑세기에는 포석사鮑石祀 혹은 포사鮑祀라는 이름으로 여러 군데 보이거니와, 祀라는 말에서 엿보듯이 이곳은 유흥을 위주로 하는 정자가 아니라, 신성한 제의祭儀 공간으로 등장한다. 요컨대 화랑세기가 말하는 포석정은 사당이다.
건립시기는 명확한 언급이 없지만, 적어도 법흥왕 이전임은 확실하다. 종래 포석정은 신라 말기에 등장하는 까닭에 막연히 그 무렵에 만든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화랑세기가 폭로하는 포석사는 그 연원이 아주 깊어 신라 초기로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을 제시한다.
2. 예식장으로서의 포사鮑祀
포석사 혹은 포사의 기능과 관련해서는 현재 두 가지 정도를 적출하는데 첫째는 예식장이 그것이며, 다른 하나는 화랑의 전당이다.
먼저, 예식장으로 활용하는 포사 사례는 아래와 같다.
첫째, 화랑 문노文弩가 황종荒宗, 곧 거칠부 딸인 윤궁允宮과 혼인을 포사에서 했다. 진평왕 시절인데, 이들의 결혼식에 진평왕과 전군殿君 세종世宗이 친림親臨했다. 세종은 지소태후의 사자私子인데, 아버지는 그 유명한 태종苔宗, 곧 이사부다.
세종이 이 자리에 참석한 까닭은 문노의 후견인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 결혼식에서 세종은 혼주 같은 구실을 했다.
둘째, 만룡萬龍과 보리菩提의 결혼이 포사에서 이뤄졌다. 이 역시 진평왕 시절이다.
이 자리에는 동륜태자비이면서 진평왕 친모인 만호태후萬乎太后가 친림했다. 만호태후는 만룡의 친모다.
셋째, 춘추春秋와 문희文姬의 결혼 무대 역시 포사다. 둘은 그 사이에서 난 첫 자식 문무왕 탄생 연대를 고려할 적에 이 결혼식은 624년 혹은 625년 무렵에 있었다. 그러니 이 역시 진평왕 시절이다. 문희는 김유신 동생이다.
이로 볼 적에 포석사 혹은 포사는 신성한 서약의 터전이었으며, 이곳에서 부부가 된다는 맹세가 이뤄졌다. 아무나 이곳에서 혼인한 것은 아니며, 왕실 혹은 최고권력자들의 웨딩홀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런 결혼식에는 왕이나 태후 같은 왕실 최고 어른이 참석하기도 했다.
3. 화랑의 전당으로서의 포사
이런 포석사가 화랑한테는 전당이기도 했으니,
문노 전에 이르기를 풍월주를 역임한 문노가 죽자 “포석사에 그의 화상畵像을 모셨다. 유신이 삼한을 통합하고서는 (문노) 공을 사기士氣의 으뜸으로 삼는 한편 각간角干으로 추증하고는 신궁神宮의 선단仙壇에서 대제大祭를 올렸다”고 한 대목이 그 성격을 잘 말해준다.
포석사에 문노의 화상을 봉안한 까닭은 아마도 이곳에서 문노가 윤궁과 결혼한 인연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이를 통해 포석사가 이제는 웨딩홀에서 화랑의 전당으로 한 단계 더 격상한 모습을 감지한다.
4. 비로소 베일 벗는 효종랑孝宗郞의 포석정 행차
삼국유사 권 제5 효선孝善 제9 빈녀양모貧女養母를 보면 화랑인 효종랑孝宗郞이 포석정을 행차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에 이르기를 효종랑이 "남산南山 포석정(삼화술三花述이라고도 한다)에서 노니니 문객門客들이 모두 급히 달려왔으나, 오직 두 사람만이 뒤늦게 오므로 효종랑이 그 까닭을 물었다"고 했다.
이에서 말하는 문객은 말할 것도 없이 화랑 효종이 이끄는 무리다. 효종은 경순왕 아버지로서, 당시 화랑이었다.
왜 효종이 그의 문객들을 대동하고 포석정에 갔는가? 그곳이 바로 화랑한테는 전당인 까닭이다.
화랑세기를 통해 비로소 효종랑이 왜 포석정에 행차했는지를 우리를 풀게 되었다.
5. 남녀 성기가 결합한 포석정
두 말이 필요없는 포석정의 현재 모습이다. 저 돌 모양이 전복이라는 조개를 닮았다 해서 鮑石亭이다. 鮑가 바로 전복이다.
한데 생긴 모양이 영 그렇다. 무엇인가? 볼짝없이 여음女陰이다. 혹은 자궁이라고 봐도 대과가 없다. 단순무식해야 한다. 신라사람들이 뭔가 심오한 추상을 좋아했다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봐라 무엇으로 보이는지?
천상 여성의 성기 그것 아닌가?
나만 그리 보인다고 생각하면 내가 변태겠지만, 많은 이가 쑥덕인다. 다 나캉 같은 생각을 한다. 실제 저것이 여음을 본뜬 것이라는 글도 있는 것으로 안다.
이건 뭔가? 단순무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저짝이 여음이라면 이짝은?
남근男根이다. 그 시작점 구유 같은 건? 불알 아니면 무슨 개뼉다귀란 말인다? 그 반대편 느티나무 뒤로도 이런 구조물이 하나 더 있었지만, 많이 훼손됐다.
불알은 몇 개인가? 가끔 터져서 하나가 남은 사람도 있지만 원칙으로는 두 짝이다.
볼짝없다. 불알 두쪽에서 시작하는 남근이 여근으로 물을 대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 바로 포석정이다.
자궁 혹은 여근은 물이 흘러야 번식 생식을 한다. 남근이 공급하는 정자를 받아야 후손을 생산한다. 딴 거 없다. 포석정은 이리도 단순하다. 그걸 모르고, 설혹 안다 해도 심각히 접근을 안 했을 뿐이다.
자! 그렇다면 남근과 결합하는 여근으로서의 포석정
답은 자명하다.
한국사 천년의 미스터리리는 이렇게 해서 마침내 풀렸다.
포석정이 예식장이라는 화랑세기는 틀릴 수가 없다!
게임 셋! 게임 오버!
6. 鮑, 곧 전복이 말하는 바
그래도 못내 내키지 않은 사람들한테 말한다. 포석사건 포사건 포석정이건 관건은 鮑. 이게 전복과 같은 조개 일종임을 말할 나위가 없다.
전복이다. 천상 여근이다. 남자들끼리는 쑥떡쑥떡한다.
곧 포석사이라는 말은 여근처럼 생긴 것을 형상화한 사당이라는 뜻이다.
왜 여근과 남근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포석정에 남았겠는가?
그건 곧 결합이며, 그건 곧 생식과 생산을 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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