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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 발굴이 환영받는 경우는 다음 세 가지뿐이다.
첫째 내가 팠을 때
둘째 그 성과가 나의 학설과 배치하지 않을 때
셋째 나랑 아무 관련이 없을 때
그런 점에서 풍납토성 발굴은 어느 고고학도도 반기지 않았다.
첫째 내가 파지 않아서였고
둘째 내 학설이 다 깨져서였고
셋째 그 내상이 미친 범위는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풍납토성 보존 제일의 적은 누구였던가?
사만 주민?
놀랍게도 그 출현을 누구도 반기지 않은 한국고고학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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