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술한 아키야마 요시후루의 프로필에서 우리가 알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아키야마는 육사 졸업때 까지 정규교육은 거의 날림으로 다녔다. 국가가 육사 졸업때까지 이런 날림교육에도 졸업장을 줄 수 있도록 방조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 당시엔 다 이랬다.
(2) 아키야마는 자기 돈 땡전 한푼 안내고 유학까지 마쳤다. 그는 국가의 엘리트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국가의 도움에 러일전쟁의 기병전 승리로 갚았다.
(3) 아키야마는 메이지 유신 당시, 신정부군에 맞서 막부편에 섰던 번의 최하급 무사였다. 그런데도 메이지 유신 기간 내내 승승장구하여 육군의 최고직위인 대장까지 올랐다. 군부는 사쓰마 죠슈 출신이 독점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본인이라면" 능력만 있다면 승진에 있어 유리천장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아키야마의 일생을 유심히 보면, 이 프로필은 우리역사에서 구한말의 역사도 아니고, 일제시대의 역사도 아니며 1950년대 이후 한국인의 프로필에 매우 닮아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메이지 초기만 해도 일본의 기업과 관료의 수준은 볼 품 없었다. 대부분 아키야마의 프로필과 다름 없는 사람들이 메이지 정부의 주력군을 형성했다.
오히려 아키야마는 메이지 유신 후에야 교육을 받기 시작한 사람이라 메이지유신 이후 집권한 소위 "삿죠"에 비해서는 훨씬 양호한 상황이라 할 수 있지만 그래도 교육 수준이 저 모양이었다.
시작은 조선이나 일본이나 거기가 거기였지만 메이지시대를 거치면서 정책적으로 국가 엘리트를 어거지로라도 형성해 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일본의 경제계도 메이지 말년이 되면 기존의 봉공인 위주의 인력풀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채용대상을 바꾸어 가기 시작하는데, 소학교에서 대학까지 일본의 교육제도가 정비되고 여기서 고등교육 수료자들이 무더기로 쏟아지면서 가능한 일이었다.
이들이 1910-1930년대의 일본의 대기업-중화학공업 발전을 견인했다.
한국의 50-80년대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한국의 50-80년대는 정책적으로 국가가 고등교육자를 양산했고, 수많은 날림 대학이 쏟아졌지만 어쨌건 대졸자가 양산되었고 이들은 우수한 공무원-회사원 인력으로 충원되었다.
일제시대?
이런 조선인 엘리트의 부상을 일본은 정책적으로 방해했다.
그 이유는 다음 편에 후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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