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은 여로 모로 인류 문화사 혁명이었다. 안경은 세계를 넓혀주었으니, 무엇보다 시력에서의 문자의 해방이었다. 안경이 이 땅에 상륙하기 전, 글자가 작은 책은 시력이 좋은 일부 계층의 전유물에 지나지 않았다. 안경이 없는 세상은 문자를 키울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남이 대신 읽어주어야 했다. 이런 거간꾼을 안경은 축출했다.
다음은 심수경(沈守慶․1516~1599)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 보이는 이야기인데, 이 무렵까진 안경이 조선에 들어오지 않았거나, 들어왔다 해도 그 쓰임이 광범위하기 못했나 보다.
육방옹(陸放翁)은 이름이 유(游)이고 자(字)는 무관(務觀)으로, 송(宋)나라 시인의 대가다. 그의 시는 호방하고 평이하여 난삽(難澁)하고 기괴(奇怪)한 병통이 없으므로, 내가 전부터 좋아했다. 우연히 유간곡(劉澗谷)이 정밀히 뽑은 한 부를 얻었는데, 이는 판서 성임(成任)이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이 간직한 것을 등사하여 인쇄한 것이다. 그런데 다만 글자가 적어서 노안(老眼)에 합당치 못하기에 글씨 잘 쓰는 친구 안한(安翰)에게 청하여 등사하여 보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시들은 노경(老境)에 지은 것이 많은데 지금 안공(安公)과 나도 80이 넘었으니, 노인이 지은 시를 노인이 등사하고 또 노인이 보는 것은 하나의 기이한 일이다. 육방옹은 벼슬이 예부 낭중 보장각 대제(禮部郞中寶章閣待制)로 있다가 치사(致仕)하였다. 향년(享年) 85세였다.
陸放翁名游字務觀。宋詩人大家也。其詩豪放平易。無險澁怪奇之病。余嘗愛之。偶得劉澗谷精抄一部。乃成判書任因徐四佳居正所儲而謄寫印出者也。第字細。不合老眼。故倩友人善寫安翰謄寫之。以便觀覽。詩多老境之作。而今安公及余皆年過八十。老人之詩。老人寫之老人覽之。亦一奇事也。放翁官至禮部郞中寶章閣待制致仕。享年八十五。
'ESSAYS & MISCELLANIES'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외국정상 관람없는 국립박물관 : 투탕카멘묘를 찾은 노무현 (0) | 2018.02.22 |
---|---|
문고본 시대의 재림을 꿈꾸며 (0) | 2018.02.22 |
가야 주체의 역사학과 임나일본부설 논쟁 (0) | 2018.02.17 |
문화재와 국가주의 망령 - 석굴암과 무령왕릉의 경우 (0) | 2018.02.12 |
해외문화재, 그 참을 수 없는 약탈의 신화 (0) | 2018.02.1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