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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안서도 둔전을 현화사에 시주했다는 기사

by taeshik.kim 2024.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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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도는 본문이 이야기하는 그것과 맞지 않는다. 다만 서해도라고 표시한 지점이 얼추 안서도랑 겹치고 그 목이 설치된 곳은 해주라는 점에서 다르니 이해를 돕는 데는 그런 데로 요긴해서 소개한다.

 
고려사절요 권3 현종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을 읽어가다 보면 그 11년, 1020년 8월에 왕이

안서도安西道 둔전 1,240결을 현화사玄化寺에 시주하니 양성兩省에서 두 세 차례나 논박했지만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八月. 以安西道屯田一千二百四十結施納于玄化寺. 兩省再三論駁, 不納.]

고 하거니와 이 말이 무슨 뜻일까? 난 이것이 무슨 뜻일가 몹시도 궁금하다. 혹 이에 관한 선행 연구가 있기는 할 법한데 찾아보지는 않았다. 

안서도라면 고려사 지리地理3에 보이는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를 말할 것이어니와 그 수도는 해주海州라, 이는 지금도 도시 이름으로 남았거으니,

이에 의하면 이곳은 태조 왕건이 군郡 남쪽에 큰 바다가 있어 해주海州라는 이름을 내리고 성종 2년(983)에 12목牧을 설치할 때는 해주에도 그 하나가 설치됐다.

그러다가 성종14년(995)에 12주州 절도사節度使를 설치하면서 우신책군右神策軍이라 부르며 양주楊州와 더불어 좌보左輔·우보右輔로 삼았다 하거니와 이는 중국 도성제에서 흔히 보이는 수도 방비 경기 지역 편제를 본떴음을 본다. 



개경과 좌보 우보 도식



그러다가 현종 3년(1012)에 절도사를 폐지하고 그 9년(1018)에 4도호부都護府를 설치하면서 해주안서도호부海州安西都護府로 고쳤다 하니, 해주가 차지하는 막강 위상을 가늠할 만하겠다.

이어 예종 17년(1122)에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하고는 고종 34년(1247)에 해주목海州牧으로 돌렸다.

속현屬縣이 3개, 관할 방어군防禦郡이 1개, 현령관縣令官이 1개, 진鎭이 1개라 하지만,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삼은 것인지는 지리지가 밝히지 않았다.

저 현화사는 현종 9년 6월 17일 무신戊申에 대자은현화사大慈恩玄化寺를 창건해 왕의 죽은 부모 명복을 빌었다 하므로 그 부모 원찰로 삼았음을 본다. 

현종이 왜 신하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저리 했는지는 이런 성격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부모를 위한 원찰이라 양보할 수 없었다고 본다. 

이어 2년 뒤인 11년, 1020년 9월에는 현종이 현화사로 행차해 새로 주조한 종을 직접 치고는 다른 신료들한테도 치게 하고는 그런 신하들한테는 각자 의복·물품·비단[匹段]을 희사토록 하기도 한다.

새로운 사찰을 대대적으로 신축하는 것은 좋은데, 문제는 그 운영이었다.

원찰로 세웠으므로 당연히 그 운영 주체는 왕실이었을 텐데, 문제는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런 거찰을 왕실이 돈 대어서 운영한단 말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일단 세우기는 해도 그 운영은 자체 해결해야 했다. 

오랜 전란에 각종 보상책으로 토지가 바닥 났을 상황에서 현종은 국유지를 골랐다. 저 말로 보아 둔전은 왕실 혹은 국가 소유였음을 안다. 



현화사 칠층석탑



둔전은 간단히 말해 군대에서 자영하는 토지다. 국방부 소유 토지로, 병농일치제를 지향한 고육지책이다. 그 땅에서 군인들이 가족들을 데리고 농사 짓고 해서 그에서 나는 소출로 군량미를 자체 해결하고 남는 것은 시장에 내다 팔아 봉급도 주고 한다. 

그런 토지를 현화사에다가 갖다줘 버렸으니 당연히 신료들은 안 된다 불가하다 극력 반대한 것이다. 

이는 대규모 사찰 건립에 따른 그 경제 자립 기반 확립이라는 측면에서 읽어야 한다고 본다. 둔전을 박탈당한 안서도 군인들은 어땠을까? 아닌 밤중 홍두께 아니었을까? 이런 불만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려 했을까? 

그렇다면 혹 군인들이 현화사 소속이기도 했나? 이런 점들이 궁금하다. 

강민경 선생은 수조권 아닐까 하는데 글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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