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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제주에서 운양 김윤식을 생각하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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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소통협력센터

 

1. 터에도 인연이라는 것이 있는 모양입니다. 제주 시내-여기서는 옛날 제주의 중심이랄 수 있는 구제주-를 어슬렁거리다가 만난 곳,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란 이름이 붙은 여기가 조선 말 한문학 대가이자 온건개화파 거두 운양 김윤식(1835-1922)이 유배와 살던 곳이더군요.

동도서기東道西器 곧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기술을 소통, 협력시켜보자는 주장을 펼친 운양이 살던 곳에 소통협력센터가 들어서다니 인연도 이런 인연이 있을까요(억지스럽다고 하면 그것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2. 김윤식은 을미사변 당시 외무아문대신으로 명성황후 폐위에 일조했다는 죄를 입어 1898년부터 1901년까지, 제주에 약 3년간 유배와 있었습니다. 여기 올 때 인천에서 화륜선을 타고 왔다니 그것부터 근대 느낌 물씬 나는데, 그가 머물 때 이재수의 난(1901년 제주민란, 신축교난)이 일어납니다. 

그는 제주성 안에 머물며 보고 들은 전개과정을 <속음청사>에 고스란히 남겼습니다. 현기영 선생 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가 그걸 바탕으로 했다지요.

뿐만 아니라 김윤식은 제주 문사들과 시문을 나누며 활발히 교류했고, 제주 사람들의 삶을 외면하지 않고 글 곳곳에 남겼습니다. 그런 그를 어떤 연구자는 "제주 유배인의 우두머리"라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김윤식 적거謫居 유허지遺墟址 표식

 

3. 이재수 난의 여파로 그는 1901년 7월 전남 신안의 지도智島로 옮겨지고, 1907년에야 석방됩니다. 그때 이미 일흔 셋 노인이었지만, 이후 김윤식은 15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 15년의 삶은 그야말로 영욕榮辱이 교차합니다. 어찌나 그의 삶이 보인 궤적이 다채로웠는지, 심지어 죽고 나서 장사지내는 일마저도 역사연구의 대상(김윤식 사회장 사건)이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잘라 말할 수 없는 생애를 산 한국 근대사의 거인(여러 의미에서) 운양 김윤식, 그런 그를 여기 제주에서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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