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터에도 인연이라는 것이 있는 모양입니다. 제주 시내-여기서는 옛날 제주의 중심이랄 수 있는 구제주-를 어슬렁거리다가 만난 곳,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란 이름이 붙은 여기가 조선 말 한문학 대가이자 온건개화파 거두 운양 김윤식(1835-1922)이 유배와 살던 곳이더군요.
동도서기東道西器 곧 동양의 정신과 서양의 기술을 소통, 협력시켜보자는 주장을 펼친 운양이 살던 곳에 소통협력센터가 들어서다니 인연도 이런 인연이 있을까요(억지스럽다고 하면 그것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2. 김윤식은 을미사변 당시 외무아문대신으로 명성황후 폐위에 일조했다는 죄를 입어 1898년부터 1901년까지, 제주에 약 3년간 유배와 있었습니다. 여기 올 때 인천에서 화륜선을 타고 왔다니 그것부터 근대 느낌 물씬 나는데, 그가 머물 때 이재수의 난(1901년 제주민란, 신축교난)이 일어납니다.
그는 제주성 안에 머물며 보고 들은 전개과정을 <속음청사>에 고스란히 남겼습니다. 현기영 선생 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가 그걸 바탕으로 했다지요.
뿐만 아니라 김윤식은 제주 문사들과 시문을 나누며 활발히 교류했고, 제주 사람들의 삶을 외면하지 않고 글 곳곳에 남겼습니다. 그런 그를 어떤 연구자는 "제주 유배인의 우두머리"라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3. 이재수 난의 여파로 그는 1901년 7월 전남 신안의 지도智島로 옮겨지고, 1907년에야 석방됩니다. 그때 이미 일흔 셋 노인이었지만, 이후 김윤식은 15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 15년의 삶은 그야말로 영욕榮辱이 교차합니다. 어찌나 그의 삶이 보인 궤적이 다채로웠는지, 심지어 죽고 나서 장사지내는 일마저도 역사연구의 대상(김윤식 사회장 사건)이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잘라 말할 수 없는 생애를 산 한국 근대사의 거인(여러 의미에서) 운양 김윤식, 그런 그를 여기 제주에서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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