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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때문에 옛날 현판을 들여다보다 보니 현판과 관련된 옛 글들도 꽤나 접하게 된다.
그 중 가장 재미있었던 글 한 토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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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에 누대樓臺 현판은 모조리 케케묵은 시들이라, 비록 청신한 구절이 있다 하더라도 가려내기 쉽지 않으니, 지을 필요가 없다.
임자순(林子順,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이 언젠가 가학루駕鶴樓를 지나갔는데, 판시板詩가 많아 만여 개나 되므로,
그 되먹지 않은 잡소리를 싫어하여 관리(館吏, 객사의 아전)를 불러 말하기를,
“저 현판들은 관명官命으로 만든 것이더냐? 아니면 안 만들면 벌을 주기라도 했느냐?”
하니,
그의 말이,
“만들고 싶으면 만들고 말고 싶으면 안 만들지요. 어찌 관명이나 처벌이 있겠습니까요.”
라고 하자, 자순이,
“그렇다면 난 짓지 않겠노라.”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이들이 다 웃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적이 관사를 불살라 남은 게 없었으며, 불사르지 않은 곳은 현판을 철거하여 불 속에 던져버렸다.
아마 하늘도 시가 높은 벽에 걸려 있는 것을 싫어했으리라.
- 허균, <학산초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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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학루'는 함경도 안변 객사에 붙은 누각으로, 일제강점기 모습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에 전한다.
지금도 남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근데 누대가 제법 크기는 해도, 현판을 만 개나 걸어놓을 만한 크기는 아닌데....
하여간 자기 시재를 엄청 자부한 허균도 백호 임제에게는 한 수 접어줬던 듯싶다.
그리고 그가 보기에 선비들이 저마다 경치 좋은 누대에 붙이는 제영시題詠詩는 영 별로였던 모양.
그러니 그런 속된 현판들이 떨어지고 불타는 것을 통쾌해했으리라.
하지만 후손된 내 입장에서는 그 현판들이 지금까지 남아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다.
조금이라도 남아있었다면 훌륭한 사료(역사학 쪽에서든, 한문학 쪽에서든, 목공예 쪽에서든)가 되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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