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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주어사走魚寺, 조선후기에 창건하고 예수쟁이들이 달린 불교 사찰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2.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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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주어사지서 건물터 3동·고대 인도문자 기와 확인
박상현 / 2022-05-19 16:11:31
불교문화재연구소 조사…"절 규모 작지 않았을 것"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경기도 여주에 있는 절터인 주어사지에서 건물터 흔적과 글자를 새긴 기와 등이 확인됐다.

불교문화재연구소는 여주시 산북면 주어리 주어사지에서 시굴조사를 진행해 건물터 유적 3동, 담장, '조와이주신'(造瓦以主信) 글씨가 있는 기와, 고대 인도문자인 범자(梵字)가 찍힌 암막새 조각, 백자 조각, 상평통보 등을 찾아냈다고 19일 밝혔다.

 

 

여주 주어사지서 건물터 3동·고대 인도문자 기와 확인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경기도 여주에 있는 절터인 주어사지에서 건물터 흔적과 글자를 새긴 기와 등이 확인됐다.불교문화재연구소는 여주시 산북면 주어리 주어사지에서 시굴조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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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사? 라는 말이 영 생소하다. 무슨 절 이름이 저렇단 말인가? 아래 첨부하는 문헌 기록들을 보건대 주어사走魚寺라 쓴단다.

날으는 달리는 물고기? 물고기가 날개 돋치거나 발통 달아 나르거나 달리다 보면 절이 되나 보다.

무슨 창건연기 설화가 있을 법한데, 불교 그 자체 이야기에서도 달리는 물고기는 썩 들어본 적이 없다.

 

‘造瓦以主信’라 읽었다는데, 좀 더 살펴봐야겠다. 기와를 만드는 이는 누구다..라는 내용이 와야지 않겠는가?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사지寺址라 했으니, 지금이야 폐허지만, 그것이 창건된 시점이 임진왜란 이후 조선후기라는 대목이 무척이나 흥미롭다.

혹여 임란 이전 절이 있다가 폐허가 된 데를 새로 지은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렇지도 않은 듯해서 맨땅에다가 처음 절을 지은 시점이 조선후기인 듯하다.

나아가 조선후기 서학쟁이들 주무대가 된 곳이라는 점도 더 흥미롭다. 나무아미타불하는 절에서 진리와 생명 되신 주 이 몸을 바치는 장소였다니, 글쎄 종교화합이라 해얄까? 아니면 불신지옥이었을까?

보통 문화유적으로서의 절터라면 우리는 삼국시대 혹은 고려시대 초창기 무렵까지 창건 역사를 지닌 사찰을 대상으로 하는데, 이건 그보다 훨씬 연대가 뚝 떨어져 현 시점을 기준으로 해도 그 역사가 불과 300년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점이 나로서는 계속 구미를 자극한다.

 

저거 어딘가가 절터란다.


어찌된 사연으로 여주시에서 이걸 파기로 하고는 불교문화재연구소에다가 조사를 의뢰한 모양인데, 이번 한 번만 파지는 않을 듯하고 향후 조사가 이어지지 아니할까 생각한다.

이번 조사성과 의미는 저렇다 하는데, 그건 저 링크한 기사를 눌러 완상해 주기 바라며, 그 토대가 된 불교문화재연구소 보도자료는 아래와 전문이 같다.

여주 주어사지走魚寺址 건물지와 명문 기와편 등 확인
- 여주 주어사지 시굴조사 현장설명회 개최 -


여주시와 불교문화재연구소는 여주 주어사지 시굴조사에 대한 조사성과 공개 설명회를 2022년 5월 20일 오전 10시 경기도 여주시 산북면 주어리 주어사지에서 개최한다.

주어사지 발굴조사는 여주시에서 추진하는 종합정비계획에 따른 역사 고증작업을 위하여 사지(寺址)조사 전문기관인 불교문화재연구소에서 2022년 5월 10일부터 실시하였다.

이번 시굴조사에서는 주어사지의 범위와 유적의 실체를 확인하고, 향후 보존·정비를 위한 학술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범자(梵字) 암막새 조각



시굴조사 결과 조선시대 건물지 3동, 담장, 석렬, 경작지 등 조선시대 주어사지 관련 유구와 폐사 이후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숯가마가 확인되었다.

유물은 추정 ‘造瓦以主信’명 기와편, 범자문 암막새편, 백자편, 상평통보 등이 출토되었다.

주어사지 중심사역에서는 건물지, 담장, 축대 등이 확인되었고, 건물지 내부에는 구들장과 온돌시설이 남아있다. 숯가마 하부에서는 건물지가 확인되며, 금당지로 추정된다.

시굴조사에서 확인된 유구는 정밀 발굴조사를 통해 산지 사찰의 가람배치 특성이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여주 주어사지는 여주시 산북면 주어리 앵자봉 서쪽 기슭에 위치하며, 창건연대 및 폐사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주어사지와 관련된 문헌 기록은 해운당대사 의징의 비석과 다산 정약용이 지은 정약전의 묘지명, 권철신의 묘지명 등에서 확인된다.

 

이거 보면 시굴 수준이다.



해운당대사 의징의 비석에는 ‘崇禎紀元後戊寅五月日’(1698년 5월)에 ‘상좌 수견천심이 세웠다’는 기록과 정조 3년(1779)에 진보적 남인 실학자인 ‘권철신이 천진암 주어사에서 육경과 양명학 등을 강학하였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주어사지는 17세기 후반 이전부터 운영되었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여주 주어사지에 남아있던 해운당대사 의징비는 1973년에 절두산으로 이전되고, 취암당대사 정여의 승탑은 1997년 여주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

여주 주어사지는 확인된 유구와 유물, 문헌사료를 통해 사찰의 중심 운영 시기는 조선시대 후기인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유지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주어사지는 중장기적인 보존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정밀발굴조사가 필요하며, 향후 주어사지에 대한 문화재 지정, 정비, 복원 등이 이루어진다면 또 다른 여주지역 대표 문화유적이 탄생할 것으로 보인다.

 

돌땡이


***


주어사走魚寺에 대한 흔적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검색하면 아래와 같은 흔적들이 노출된다.

1779년(정조 3, 18세) 진주공의 명으로 공령문(功令文)을 공부했고, 성균관에서 시행하는 승보시(陞補試)에 선발되었다. 손암 정약전이 녹암 권철신을 스스로 모셨는데, 기해년(녹암 44세, 손암 22세, 다산 18세) 겨울 천진암(天眞庵) 주어사(走魚寺)에서 강학회를 열었다. 눈 속에 이벽이 밤중에 찾아와 촛불을 켜놓고 경전에 대한 토론을 밤새며 했는데, 그 후 7년이 지나 서학에 대한 비방이 생겨, 그처럼 좋은 강학회가 다시 열릴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경세유표 > 다산 정약용 연보)

선형(先兄) 약전(若銓)이 공(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을 말함-인용자)을 스승으로 섬겨 지난 기해년 겨울 천진암(天眞菴) 주어사(走魚寺)에서 강학(講學)할 적에 이벽(李檗)이 눈오는 밤에 찾아오자 촛불을 밝혀 놓고 경(經)을 담론(談論)하였는데, 그 7년 뒤에 비방이 생겼으니, 성대한 자리는 두 번 다시 열리기 어렵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다산시문집 제15권 > 묘지명)

얼마 뒤에는 다시 녹암(鹿菴) 권철신(權哲身)의 문하(門下)로 들어가 가르침을 받았다. 언젠가 겨울에 주어사(走魚寺)에 임시로 머물면서 학문을 강습하였는데, 그때 그곳에 모인 사람은 김원성ㆍ권상학(權相學)ㆍ이총억(李寵億) 등 몇몇 사람이었다. 녹암이 직접 규정(規程)을 정하여 새벽에 일어나서 냉수로 세수한 다음 숙야잠(夙夜箴)을 외고, 해 뜰 무렵에는 경재잠(敬齋箴)을 외고, 정오(正午)에는 사물잠(四勿箴)을 외고, 해질녘에는 서명(西銘)을 외게 하였는데, 장엄(莊嚴)하고 각공(恪恭)하여 법도를 잃지 않았다. 이때 이승훈도 자신을 가다듬고 노력하였으므로 공은 이와 함께 서교(西郊)로 나아가 심유(沈浟)를 빈(賓)으로 불러 향사례(鄕射禮)를 행하니, 모인 사람 백여 명이 모두, “삼대(三代)의 의문(儀文)이 찬란하게 다시 밝혀졌다.” 하였으며,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사람 또한 많았다. (다산시문집 제15권 / 묘지명墓誌銘 / 선중씨先仲氏 묘지명)

이로 볼 적에 주어사는 천진암天眞庵이라는 암자에 소속된 절이 아닌가 한다. 천진암은 다른 데서 보면 천진사天眞寺라는 명칭으로도 보인다. 그 위치라든가 연혁은 내가 더는 추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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