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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적, 족보, 일기 이야기 (역사인구학)

영남 사족의 기원[5] 길재 이후의 듣보잡이었던 도통

by 日莫途遠 2026.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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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은 길재를 배향한 구미 금오서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요즘은 사림을 설명하면서 정몽주, 길재에서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로 이어지는

소위 사림의 도통에 대해 하도 이야기를 많이 하니 

우리는 이 양반들이 원래부터 대단했던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영남 사류들이 유종으로 들고 나온 정몽주, 

출발은 별볼일 없었지만 훈구파의 시대에 이미 불사이군의 상징으로 추앙된 길재와는 달리 

그 이후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등은 

도통을 이었다고는 하지만 이 양반들은

처음 이 주장이 나왔을 당시만 해도 조선의 중앙 정계의 사류들이 볼 때는

듣보잡 아니면 평가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다시 말해 길재까지야 어떻게 봐 줄 수 있다 해도

그 아래 학맥은 영남의 사류들이 주장하듯이 그렇게 대단한 존재인지

반신반의하거나 백안시하는 상황이었다는 뜻이다.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은

위로 정몽주, 길재로 연결되지 않으면 

자신들의 경력만으로는 절대로 도통을 외칠 수 없는 사람들이고, 

쉽게 말해 자가 발전이 안 되는 양반들이다. 

따라서 이 양반들의 학맥에 대한 현창이 처음 시도되었을 때만 해도

길재야 그렇다고 쳐도 그 아래 이름도 처음 드는 사람들이거나, 

그렇게 뭐 대단해 보이지도 않는데?

하는 반응 때문에 이들을 문묘 종사하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할 수 있다. 

이들 학맥이 우리나라 사림의 정통 도통이 되고 그안에서 여러 문묘종사자가 나와 

결국 영남 사림의 주장이 중앙정계에서 최종 승리를 거둘 수 있게 된 데는 

누가 뭐래도 조광조 때문이었다. 

결국 조광조와 그 일파가 피로 순교한 덕에 

그 순교자의 피로 길재에서 당대 사림에까지 연결되는 학맥은 조선을 대표하는 신유학의 한국판 도통으로 공인받게 되고, 

조선전기 중앙정계를 주름잡던 전통의 사류들은 

어어 하는 사이에 명분을 뺏기고 뒷방으로 밀려나 버리게 된 것이다. 

영남 사림들이 조선 전기에 거둔 최종적 승리는 

그 지역 사류들이 중앙정계로 나가 무슨 무슨 벼슬을 하고 했다는 그런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학맥을 문묘 종사시켜버리고, 

정몽주에서 이어지는 도통을 자기들 쪽으로 귀속시켜 버림으로써

우리가 조선 사류의 적자라는 주장을 할 수 있게 된 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들이 문묘 종사의 정치적 함의에 주목하고 

집요하게 자신들의 스승과 학맥을 문묘에 연속적으로 종사시키려 했고, 마침내 성공한 것은

매우 탁월한 정치적 전술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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