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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이야기

영남 사족의 기원[3] 길재와 정몽주

by 신동훈 識 2026.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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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임고서원. 원 저작자는 영천시청이다. 정몽주를 배향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영남 사족들의 경우, 다른 지역과 달리 

이 지역에 고대국가가 성립한 이후 큰 변화 없이 향촌 질서가 그대로 유지되어 조선 전기까지 내려왔을 것이라 하였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보면 이 지역에 성립한 고대국가가 삼국통일을 하고, 

후삼국 쟁패기에 최후 승자인 기내 지역의 고려왕조에 요즘으로 친다면 우호적 합병 (friendly M&A)을 한,

간단하다면 간단한 두 번의 정치적 계기에서 보여준 이 지역의 선택은 

소백산맥을 경계로 다른 지역과 확연히 구분되는 지적 고립과 함께 

정치적으로도 장기간에 걸쳐 향촌 지배체제가 크게 흔들리지 않고 그대로 내려오는 결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조선 전기를 보자. 

조선 전기는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기전지역의 사족이 우위를 점하여 성립한 정권인데, 

고려시대와 차이를 따지자면, 우호적 합병을 할 수 있었던 고려시대와는 달리

조선의 건국에는 이 지역이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한 데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여말 선초 조선왕실이 지배세력의 교체와 사전혁폐를 통해 확보한 공전 안에는

당연히 영남 지역의 땅은 많이 없었을 것이므로, 

별다른 중앙의 개입 없이 자연스러운 고립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를 조선왕조의 건국과 고려왕조의 멸망이라는 왕조교체의 시대에, 

전 왕조에 대한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길재의 학맥 때문으로 사림은 미화하지만

딱히 보면 이 지역이 선택한 정치적 고립 외에 또 다른 뭐 뾰족한 수가 있냐 하면 그런 것도 없으니, 

조선전기 성종 때까지 이 지역은 중앙정권과 거리를 두는 고립의 시대를 맞게 된다는 말이 되겠다. 

여기서 이 지역의 사족들이 중앙정계로 복귀하는 데 있어 중요한 근거가 된 

두 사람을 이야기 하겠다.

한 사람은 정몽주, 그리고 또 한 사람은 길재다. 

이 두 사람은 여말선초 조선의 건국의 시점에 왕조교체에 반대하다가 

한 명은 죽고 또 다른 한 명은 낙향하여 은거하게 되었는데, 

이 두 사람은 모두 영남 사족과 깊은 관련이 있다. 

따지고 보면 정몽주와 길재는 고려왕조가 온존하던 당시 누리던 정치적 포지션이 동일하다 할 수 없다. 

정몽주는 조선 건국 직전 이미 아무도 그를 무시할수 없을 정도의 유종의 위치를 누리고 있던 이라, 

그를 폭력적 수단으로 제거한 이방원조차, 그에 대해서는 자신이 재위하고 있던 시절, 이미 정치적 복권을 시도할 정도로

당시 사족 사이에 명망이 높았던 사람이다. 

그에 비해 길재는 고려 왕조가 망할 당시, 사족들 사이에 그의 포지션은 보잘것 없던 사람이다. 

다만 그가 고려 멸망 당시 벼슬과 사족들 사이의 명망에 비하면

그가 영남으로 낙향하여 죽을 때까지 듣보잡이었다고는 볼 수 없으니, 

조선왕조 건국에 적극 참여하여 사실상 조선 전기 유종의 위치를 누리던 권근조차, 

그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할 정도로 살아 생전에 이미 불사이군의 절개를 지킨 선비로 이름이 높아졌다. 

이 두 사람은 조선 전기, 소위 말하는 훈구파가 득세하던 때에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영남의 사족들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조선 건국과 함께 정치적으로 고립된 이 지역 사족에게 

권토중래의 기회를 마련해 줄 씨앗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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