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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보 이야기

영남사족의 기원[2] 그 많은 분급 하사 토지는 어디에서 왔을까?

by 신동훈 識 2026.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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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5대왕 문종의 적장녀이자 6대왕 단종의 동복누나인 경혜공주(敬惠公主, 1435[1] ~ 1474)가 죽기 직전인 1474년(성종 5년)에 남긴 친필 재산상속 분재기(分財記). 도대체 저 땅은 어디에서 왔을까?

 

영남사족의 특징에 대해 설명하자면

빼 놓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지역은 외부에 의해 해체된 역사적 계기가 이천년래 한 번도 눈에 띄지 않는 점이라 하였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생각해 보면 이렇다. 

당장 삼국 통일 이후 통일신라는 어쨌건 제쳐 두고라도, 

고려 전기 전시과제도, 조선전기의 과전법 체제

두 체제 모두 국가가 사실상의 소유권과 수조권을 모두 쥐고 있는 땅이 반드시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잊고 있는 것 같다. 

 

한글 분재기.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한 나라가 건국한 후 이런 식의 공전에 기반한 토지분급제도를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예를 들어 고려의 전시과 제도-. 

도대체 무슨 땅을 가지고 전시지를 나눠주겠는가 말이다. 

특히 우리는 고려 전기만 해도 호족의 연합체제로 국가의 권력이 향촌까지 미치지 못했다고 하면서도, 

정작 공전에 기반한 전시과체제는 그럭저럭 작동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상식적으로 공전-전시지를 나눠줄 땅이 있어야 전시과 체제가 시작이라도 하지 않겠는가? 

이런 상황은 조선 전기도 마찬가지다. 

과전법 체제라는 것은 결국 전시과제도 시즌 2라고나 할까.

공전에 기반한 토지분급제도의 또다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조선시대는 여기다 다른 토지 수요가 하나 더 있었다. 

고려시대에 비해 정교하게 계획된 왕실종친의 유지인 것이다. 

알다시피 조선왕조는 왕의 후손 4대까지는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는 대신에, 

이들에게 토지를 과전법 체제하에 분급하였다. 

그 땅이 얼마나 많았냐 하면 대군에게 분급된 과전 토지는 관료 중 최정상급인 영의정보다 더 많았다. 

게다가 후손 4대까지 먹고 살 땅을 나눠줘야 하니 토지수요는 점점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 땅이 모두 어디서 나왔을까? 

결국 조선전기 사전혁파를 통해 창출한 고려왕조 일부지배층 (왕실 포함)으로 부터 탈취한 땅, 

그리고 주기적으로 일어난 반란과 내전 (왕자의 난이나 계유정난 등) 등으로 뺏은 땅을 가지고 나눠줄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실이 유지하고 있어야 할 공전의 액수는 줄었으면 줄었지 늘지는 않았을 것이, 

4대를 끝내고 사족으로 독립해야 할 종친이 빈손으로 나갔을 것 같은가? 

결국 이들 손에도 뭔가 쥐어줘서 내보내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왕실이 쥐고 있어야 할 공전이 얼마나 커야 했던가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썼지만, 조선 전기 종친에게 분급된 공전 중 상당액은 아마도 고려왕실 땅에서 넘어왔을 것인바, 

이런 땅은 거슬러 올라가면 전시과 체제 하의 공전에도 닿고, 

더 올라가면 삼국통일, 후삼국통일기에 도태한 지배계층이 쥐고 있다가 이들로 부터 탈취한 땅까지 가서 닿을 것이라 보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이 있었던 공전에 기반한 토지 제도. 

전시과제도와 과전법 체제의 기반이 된 공전액의 상당 부분은 

그 기원을 따라 따라 올라가면 결국 삼국시대와 후삼국시대 도태한 향촌 지배층의 토지까지 가 닿을 것이라 보는 것이다. 

앞서 전주이씨의 분포도를 보면 기전 지역 외에 한반도 서남지역 상당히 남쪽까지도 내려가는 바, 

필자는 이는 왕실 종친들이 이 지역에 많이 분포하던 공전을 받아 영유하게 되면서 벌어진 상황이라고 보는 것이다. 
 
*** 편집자주 ***
 
경상도 땅은 나누어주려 해도 전부 주인이 있어 힘들었을 것이며, 설혹 땅이 있어 준다 해도 가져갈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저 먼 데를 마름 두어 관리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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